매일신문

[독자 참여마당] 수필-나의 친구야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한 번도 다른 반이 된 적이 없다. 6년 동안 같은 반으로만 공부를 했다. 그땐 키 순서로 번호가 불렸다. 키가 작은 사람은 앞줄, 큰 사람은 제일 뒷줄에 섰다. 실은 그 친구보다 내가 조금 아주 조금 키가 작다. 선생님 앞에서 키를 잴 때 뒤꿈치를 살짝 들고 쟀다.

그 친구는 미술반, 난 운동신경이 있어 축구반에서 활동했다. 1번(그 친구)은 매년 미술대회에 나가면 상을 타는 등 그림 하나는 짱이었다. 난 태권도, 합기도 유단자라서 뒤에 있는 큰 친구들도 나에게 나서지 않았다. 그 친구는 매일 괴로움을 당하고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화장실에 갔는데 퍽퍽 소리가 났다. 일을 보고 창문으로 고개를 내미니 1번 친구가 맞고 있었다. 간섭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날 큰 친구랑 나랑 싸움이 붙었다. 나중에는 교무실에 가서 벌을 받았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런 일 뒤 그 친구와 난 둘도 없이 형제 같은 친구가 되었다. 수산고등학교였기에 졸업을 하면 대부분 원양어선을 타고 외국으로 고기를 잡으러 나간다. 1번 친구는 가정이 어려워 졸업과 동시에 원양어선 3등 항해사로 취직이 되었고 난 대학에 진학하였다.

가끔 한국에 들어오면 서로 만나 우정을 소주와 함께 밤을 새웠다. 그런 뒤 몇 년 동안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너무 바빠서 연락이 안 되나 싶었다. 그러다 친구에 대한 기억이 사라질 즈음 다른 친구로부터 그 친구가 몇 년 전 태풍을 만나 물에 떨어졌는데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순간 믿을 수가 없어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았다. 친구는 고등학교 때 이미 아버지 어머니를 떠나 보냈다. 얼마 뒤 형마저 바다에 빠져 찾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1번과는 더욱더 친하였다.

그 순간 옛 추억들이 필름처럼 기억이 났다. 젠장 그래서 소식이 없었구나 생각하니 미안함이 눈물이 되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친구의 기억은 잊혀 버렸다. 나 또한 바쁘게 살다 보니 친구와의 기억은 저 멀리 가버렸다.

어느 날 밤, 새벽 2시쯤 되었을까. 대문을 두드리며 친구야 친구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꿈인가. '어느 ×이 이 새벽에 미친놈 아이가.' 비몽사몽으로 문을 열었다. 밖은 깜깜하여 시꺼먼 물체만 보일 뿐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야, 친구야 내다, 철이다."

학교에서 철이가 5명이나 되었다.

"누구 철이 말이고?"

"내 아이가. 1번 아이가. 작은 철이다."

난 기절할 뻔했다. 죽었다는 사람이 아닌가. 어두운 곳에서 적응이 되니 누군지 알 수가 있었다. 정말 그 친구였다. 세월이 흘러 모습이 많이 변하였지만 그 친구가 맞았다. 많은 고생을 한 듯 보였다. 돈 5만원만 빌려달라 한다.

택시비를 줘야 한다고 또한 잠을 잘 곳이 없다 하여 우리는 가까운 여인숙에 들어가 밤새도록 살아왔던 일들을 들으며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그땐 물에 빠져 이틀 뒤에 다른 배에 의해 구조가 되었다 한다. 그일 뒤에 배를 타지 않고 여기저기 일을 하였다 한다. 너무 취하여 우리 둘은 손을 꼭 잡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보니 아침 10시가 넘었다. 옆에 자고 있어야 할 친구가 보이질 않았다. 화장실 갔나, 어디 갔지.

그 일이 있은 후 또 수십 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그 친구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친구야 보고 싶다.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 아니가. 보고 싶다.

김병관(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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