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이건 아니잖아요!

'행복한 일자리 창출, 경제 민주화, 사회적 불균형 해소, 안전한 사회 건설, 친환경 급식, 보편적 노인 복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다. 기억을 멀리 더듬을 필요는 없다. 바로 이번 지방선거에서 등장한 공약들이다. 광역단체장이 아니라 기초의원 후보들의 공약이다.

2012년 대선 당시 등장한 공약들과 정말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포부가 커서인지, 따로 공약을 만들기가 귀찮아서 좋은 말만 베껴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라 걱정하는 지극한 정성에 감격해볼까도 싶었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솔직함이 지나치면 신문에 쓸 수 없는 말이 튀어나올까 걱정스러우니 이쯤에서 접기로 하자.

기초의원들의 역할을 폄훼하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대통령이 동사무소 지을 터를 갖고 왈가왈부하면 동네 개가 웃을 일이듯이 제 역할과 책임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큰 약속을 하면 웃음거리밖에 안 된다. 이런 공약들을 보면서 '공약 판정기'가 등장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후보자가 이런저런 공약을 내걸면 판정기가 알아서 '열심히 하세요', '삐익~ 당신은 시장(군수) 출마자가 아닙니다', '삐익~ 차라리 2017년 대선에 출마하세요!' 등등을 알려주는 식이다. 사실 판정기가 없더라도 조금만 상식을 갖고 들여다보면 알 수 있지만. 오죽하면 한 기초의원 출마자는 이런 소리를 했을까. "기초의원이 무슨 시장'국회의원도 아니고 수십억 원짜리 공약을 마구 남발한다. (나는) 동사무소 새로 짓는 데 집중하겠다."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자. 혹시나 싶어 1995년 첫 지방선거 관련 기사를 검색해봤다. 검색능력이 떨어지는 탓인지, 제대로 스크랩이 되지 않은 탓인지 알 수 없지만 놀랍게도 공약 관련 기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공약 대신 후보들의 경력, 공천을 주는 국회의원이 속한 정당의 영향력, 후보들 간의 팽팽한 기 싸움과 이합집산 등이 거의 주류를 이뤘다.

'왜 그럴까? 고민 끝에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공약을 안 낸 것이 아니라 못 낸 것이다. 1995년 지방선거는 1961년 잠시 등장했다가 군홧발에 짓밟혀 돌잔치도 못해보고 비명횡사한 뒤 무려 34년 만에 부활한 것이다. 지방자치를 기억하는 한 세대가 지난 뒤 새로 시작했으니 과연 지방의회'단체장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권한이 있는지도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초창기 지방자치에서는 말로 다 못할 촌극까지 빚어졌다. 제 역할의 한계를 잘 몰라 마음껏 분탕질 치다가 철창 신세를 지는 이도 많았고, 뭘 할지 몰라 임기 내내 눈치만 보다가 허송세월한 이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 중에도 책임과 의무를 다한 빛나는 보석들도 있었다.

그런 질곡의 세월 속에도 지방자치는 무럭무럭 성장했고, 어느덧 성년이 됐다. 혈기방장한 20대로 접어든 탓일까. 저마다 의욕이 충만하다. 그런데 넘쳐도 너무 넘친다. 이번 선거에 등장한 공약들이 제대로만 지켜진다면, 아니 10분의 1만 이뤄진다면 그야말로 '행복이 넘쳐나는 대한민국'이 되기 직전일 터이다. 가슴 설레는 '아! 대한민국'도 머잖았나 싶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행복한 일자리'에 기대를 거는 실업자도, '보편적 노인 복지'를 기다리는 노인도, '안전한 나라'는커녕 '안전한 통학버스'에 가슴 설레는 학부모도 없다.

후보자들도 공약 보고 찍어줄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고, 유권자들도 공약 보고 찍을 생각이 없었다. 공약은 선거홍보물과 인터넷 배너광고의 빈칸을 채워줄 공허한 약속일 뿐이다. 뒤늦게 이런 이야기를 해봐야 '새삼스레 왜 그래?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하며 한 번 피식거리고 웃어넘기는 상황이 됐다. 하도 어이없다 보니 웃지도 않으려나.

그런데 쓴 가루약을 먹고 미처 헹궈내지 못한 씁쓸함이 입안에 가득하다. 만약 어차피 지키지도 못할 약속이니 그냥 그렇게 넘겨버린다면, 2018년 선거가 다가와도 여전히 '일자리는 불행하거나 아예 없을 것이고, 노인들은 세금 축내는 뒷방 늙은이 취급받으며 젊은 세대 눈치를 봐야 하고, 언제 어디서 우리 아이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해도 말 한마디 못 꺼내는 나라'가 그대로 일 것 아닌가. 영화 속 한 배우가 '이건 아니잖아요'라고 두 눈을 부릅뜨고 아무리 외쳐봐도 소용없던 그 나라.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바로 그 나라….

참! 앞서 제대로 된 자리에 동사무소 짓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공약했던 기초의원 후보는 낙선했다. 그는 경북의 무소속 후보였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