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조선독립 외치며 헤이그에서 삶 마친 이준

"사람이 산다 함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라."

이준(李儁)은 1859년 함경도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하여 고아로 할아버지와 숙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1895년 처음 설립된 법관양성소에 들어가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법관생활을 시작했다. 고위 관료들의 비리를 척결하고 사회정의 실현에 나서다 중상모략으로 2개월 만에 옷을 벗고 서재필 박사를 만나 협성회를 조직, 구국 활동을 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早滔田)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해 만민공동회 활동을 했다. 조정의 실정을 탄핵하다 투옥됐고 1902년엔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만들었다. 또 러일 전쟁 뒤 일제의 내정간섭을 반대하는 시위운동을 벌였다. 친일세력의 일진회에 맞서 공진회를 조직, 회장을 맡아 맞대응하다 유배되기도 했다.

일제가 을사오적을 앞세워 국권을 강탈하자 을사조약 폐기상소 운동도 펼쳤다. 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 개최에 맞춰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파견됐다. 세계에 일제의 한국침략 야욕을 폭로했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외쳤다. 일제의 방해로 그의 호소는 물거품이 됐고 1907년 오늘 격분을 참지 못하고 순국, 현지에 묻혔다가 1963년 서울 수유리 선열묘역에 안장됐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정인열 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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