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이라는 표현은 어느 분야에나 존재한다. 호불호를 넘어선 절대적 가치에 부여하는 최고의 수식어이다. 다소 진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쉽게 얻을 수 없는 호칭임은 분명하다. 클래식에서도 몇 가지의 바이블이 있다. 그 중 베토벤이 남긴 32개의 피아노 소나타는 피아노 음악의 '신약성서'라 불린다. 한 번 읽고 덮는 책이 아니라 읽을수록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책처럼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무수히 들어도 늘 새롭다.
나에게 충격적인 결정타는 역시 Op.13의 C단조 8번 '비창'이다. 베토벤이 28세에 작곡한 곡으로 흔히 '월광' '열정'과 함께 3대 소나타로 불린다. 삶과 세계에 대한 비극적인 전망, 저 너머 세계에 대한 끝없는 동경이 동시에 느껴진다. 극단적인 음량의 대조와 강렬한 타건의 1악장을 듣고 있으면 심적인 동요와 긴박감에 마치 영혼을 빼앗길 듯한 불안감에 휩싸인다.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흐름, 감상자를 질리게 할 정도의 역동적인 울림. 베토벤의 곡은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작곡가로서뿐만 아니라 피아니스트로도 대중을 사로잡았던 베토벤의 연주를 직접 들어보고 싶다는 충동도 인다. 파도 같은 격동과 깊이로 다른 연주를 모두 개울물 소리처럼 들리게 했다는 그의 연주가 궁금하다.
오늘은 빌헬름 박하우스의 연주를 듣는다. 현대의 관점으로 보자면 박하우스의 연주는 분명 구식이다. 내향적이고 무뚝뚝하고 단단하다. 그러나 그의 연주를 버릴 수 없는 이유는 그는 베토벤 음악의 확고한 설계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비창'의 질풍노도처럼 빠른 긴장감을 그는 과도한 연출 대신 자연스러운 연주로 해낸다. 멋은 없지만 그의 방식대로. 조용하고 강하다. 연주자는 슬픔을 풀어놓지 않으려 하지만, 나는 그의 깊은 호흡 속에서 슬픔을 느낄 수 있다.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은 연주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의 연주 또한 들어볼 만하다. 그는 12세의 나이로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데뷔한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얼마 전 그의 연주를 듣고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마치 사랑을 느낀 순간처럼 이가 시리고 호흡이 빨라졌다.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를 감정. 그는 10대에 첫 피아노 독주회를 연 이후 푸르트벵글러에게 발탁됐다. 이후 '베토벤 전문가'의 행보를 걸으며 베토벤 교향곡과 피아노 소나타 연주에 집중했다. 다국적 연주자로 구성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창단, 분쟁 지역에서 연주해 행동하는 음악인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지닌 정체성, 베토벤에 대한 천착,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라는 두 가지의 병행이라는 경력은 그의 의식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의 '비창'은 그만의 개성적인 해석과 연주 방식이 돋보이며, 그가 녹음한 수많은 베토벤 소나타 중에서도 두드러진다. '바이블'을 펼쳐 기꺼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명민한 피아니스트들의 연주에 하루쯤 귀를 맡겨보는 것은 어떨까.
신동애(오디오 동호회 '하이파이클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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