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쫄지 마! 대한민국

지난 6월, 24박 25일의 장기 출장을 다녀왔다. 브라질 월드컵 취재였다. 나름대로는 새해 벽두부터 꼼꼼히 출장 준비를 한다고는 했지만 결국 빠트린 게 있었다. 뎅기열 등 풍토병 예방 접종이었다.

'뭐, 별일 있겠어' 하는 마음으로 출국했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러시아와 1차전을 치렀던 쿠이아바에서는 날씨가 무더웠던 탓에 모기퇴치제를 연방 뿌려댔다. 아열대 지방에서 흔한 뎅기열은 모기가 전염시키는 질병이다.

다행히 아무 탈 없이 돌아왔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 바이러스가 무서운 기세로 퍼지고 있다는 뉴스 때문이었다. 브라질에서 귀국하면서 서아프리카 토고와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를 거쳐온 게 꺼림칙했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치사율이 무려 90%에 이른다는 점이 걸렸다. 그러나 며칠 동안의 고민은 그야말로 기우에 불과했다. 아무런 신체 증상도 겪지 않은 채 한여름 밤의 쓸데없는 망상으로 끝났다. 괜한 호들갑을 떤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속으로나마 창피하기까지 했다.

사실 대한민국 국민은 에볼라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다.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온 나라를 비탄에 빠트렸고, 윤 일병 사건은 우리 사회의 도덕 불감증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요즘 전국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싱크홀은 속으로 문드러진 우리 사회의 자화상 같아 두렵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충격적인 추문은 과연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인가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검찰총장은 혼외 자식의 존재를 부인하다 결국 불명예 퇴진했다. 그것도 모자라 한 검사장은 상식 밖의 공연음란죄란 혐의로 처벌을 받을 처지다.

이뿐인가! 여야 국회의원 일부는 입법 로비 등의 혐의로 구속되거나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받고 있다. 한 광역자치단체장은 아들의 후임병 폭행'성추행 혐의로 낯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체면을 구겼다. 인종'종교를 빌미로 중동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폭격이나 미국 중부 어느 도시의 폭력시위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은 상처투성이다.

그러나 대한민국호(號)가 거센 풍랑을 이겨내지 못하고 침몰할 것이란 자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개탄과 절망만 존재하는 나라라는 우리 내부의 패배의식도 수긍하기 어렵다. 영화 '명량'에서 '지금 독버섯처럼 퍼져 있는 두려움이 문제'라고 질타한 이순신 장군(최민식 분)은 작금의 현실을 어떻게 보실지….

맹목적인 낙관론이나 애국주의를 펴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현실이 엄중하다. 다만, 스스로 자립할 능력이 없는 정체된 민족으로 낙인 찍었던 일제 식민사관의 유령이 아직 한반도를 떠나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근거 없는 니힐리즘은 조악한 감상주의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던 소설 '젊은 날의 초상'(이문열 지음)의 한 대목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한국의 월드컵 조별리그가 허무하게 막을 내린 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상파울루 외곽의 허름한 건물을 찾은 일이 있다. 10년 전 맨손으로 이민을 떠나 이제는 어엿한 사장님이 된 동창생의 하도급 공장이었다. 중남미 국가에서 온 불법이민자들의 생활 터전이기도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점심을 거르면서까지 악착같이 일했던 친구는 이런 말로 위로했다.

"한국사람들은 다 좋은데 너무 자신감이 없는 게 탈이야.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우리나라 사람만큼 열정적이고 성실한 민족은 보지 못했어. 너무 쫄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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