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징비록'을 선물할까

기자는 '이순신' 마니아인 것 같다. 어릴 적 책장에 꽂힌 수십 권의 위인전기 중 가장 먼저 꺼내 읽은 게 이순신 편이었고, 또 가장 많이 읽었던 것도 그 책이었다. 커서는 김탁환의 '불멸'과 김훈의 '칼의 노래'를 탐독했고, 난중일기 등 여러 권의 이순신 관련 서적을 뒤적였었다.

김명민이 열연했던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2005년)을 놓칠까 봐 방영 시간에 맞춰 주말과 휴일 스케줄을 조절했던 기억도 있다. 얼마 전엔 영화 '명량'이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장 영화관으로 달려갔었다. 결혼과 동시에 발길을 끊다시피 했던 영화 관람이었지만 스크린 속 '성웅'(聖雄)과의 만남을 놓치고 싶지 않아 개봉 첫날 걸음을 뗐었다. 이쯤이면 기자의 이순신 흠모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일편단심(一片丹心 )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바로 그 이순신이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적과 맞서 충(忠)과 의(義)로 지켜냈던 진도 앞바다서 올해 4월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은 '나 살겠다'고 어린 학생들을 침몰하는 배에 내버려 둔 채 구조선으로 몸을 옮겼다. 세계 해전사를 빛낸 이순신의 명량 '신화'는 417년이 지난 후 아이러니하게도 이준석 선장과 그 일당으로 인해 세계 선박 운항사의 유례없는 수치로 조롱을 받고 있다.

뒷수습을 두고 벌이는 정치권의 행태는 실의에 빠진 국민을 또 다른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규명과 국가 혁신을 통한 안전하고 행복한 대한민국 만들기의 첫 과제가 될 세월호 특별법 제정은 여'야 정치권의 엇갈린 계산 등과 맞물려 걸음조차 떼지 못했다. 여'야의 줄다리기를 보고 있자니 국가의 존폐가 풍전등화 같고 백성이 죽음에 내몰린 때에도 당파의 이해득실만 따진 임란 정국의 조정(朝廷)과 닮은 것 같아 분노가 치민다.

기자는 이런 정치권에 다가오는 추석 선물로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을 사서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임란 당시 도체찰사에 영의정까지 맡아 정국을 총지휘했던 류성룡이 눈물과 회한으로 써내려간 자기반성이자 '지난날의 잘못을 꾸짖고 후대의 우환에 대비하라'는 가르침을 담은 징비록의 교훈을 알려주고 싶어서다. 그리고 이 책을 열독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철저한 원인 규명과 처벌, 재난안전망 구축 등 국가 대혁신의 기틀을 다지고 완성해 더는 이 같은 아픔이 우리 곁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현대판' 징비록을 써줬으면 하는 기대도 담겨 있다.

이순신을 발탁한 류성룡은 1598년 이순신이 철수하는 왜군을 노량 앞바다에서 가로막고 서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고 독전하다가 전사한 그날 임금으로부터 파직당한 뒤 낙향해 몸소 겪은 임진왜란을 써내려갔다.

그는 '아아, 임진년의 재앙은 참담하였다.… 백성들이 떠돌고 정치가 어지러워진 때에 나 같은 못난 사람이 나라의 중책을 맡아 위기를 바로잡지 못하고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떠받치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는 글로 책을 시작했다.

이순신의 강력한 리더십을 그린 '명량'이 세월호 참사의 뒤처리로 어지러운 때와 맞물려 1천600만 관객을 영화관으로 불러들이며 한국 영화사를 새로 쓰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관람했고 정치인들도 그 행렬에 대거 동참했다고 하니 부디 징비록의 교훈을 새겨 훗날 영화 첫 장면에서처럼 이순신의 충(忠)을 역모로 몰아 고문받게 하는 임금, 신료와는 다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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