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서각의 시와 함께] 내 작은 비애

내 작은 비애

박라연(1951~ )

소나무는 굵은 몸통으로

오래 살면 살수록 빛나는 목재가 되고

오이나 호박은 새콤달콤

제 몸이 완성될 때까지만 살며

백합은 제 입김과 제 눈매가

누군가의 어둠을 밀어낼 때까지만 산다는 것

그것을 알고부터 나는

하필 사람으로 태어나

생각이 몸을 지배할 때까지만 살지 못하고

몸이 생각을 버릴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

단명한 친구는 아침 이슬이라도 되는데

나는 참! 스물 서른이 마냥 그리운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슬프다

-시집 『너에게 세 들어 사는 동안』 문학과지성사, 1996.

출산율은 낮아지고 수명은 길어진다. 노령인구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옛날에는 천수를 누리는 노인이 귀했기에 노인이 대접받고 존경받는 때도 있었다. 노인의 수효가 늘어나면서 노인은 젊은이들이 부양해야 되는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 참 쓸쓸한 일 맞다. 그래서 요즘 어떤 대중가요 가사에는 '너는 늙어 봤니, 나는 젊어 봤단다'라는 구절도 들린다.

시인은 소나무, 오이, 호박, 백합 등의 수명에 대해 열거한다. 모두들 그 효용 가치가 소멸하면 그 수명도 다하게 되는 것들이다. 사람은 어떠한가? '생각이 몸을 지배할 때까지 살지 못하고/몸이 생각을 버릴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라 했다. 아무리 살고 싶어도 몸이 쇠하면 몸도 생각도 함께 소멸하는 것이다.

화자의 비애는 늙어서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데 있다. 아무리 그리워해도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일이기에 느끼는 비애다. 시인의 비애에 공감한다. 누구나 그러하다는 것을 시를 통해 공감했기에 시인의 작은 비애는 우리에게 작은 위안이 된다.

권서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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