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때가 되면 안 조장의 불그레한 얼굴이 떠올려지면서 가슴에 뜨거운 기류가 흐르며 새삼 추석의 의미가 아로새겨진다. 내가 한국에서 첫 직장에 다니게 되면서 숙사를 잡게 되고 보니 공교롭게도 우리 야간조의 안 조장이 건넛집에 기거했다.
그는 일이 끝나거나 휴일이면 가끔 김치찌개에다 우리 동포 근로자들과 한잔 나누길 가리지 않았고 생활에서도 직장에서도 여러모로 불편함이 없도록 같이 방법을 타진하고 해결해오기를 애면글면했다. 애송이로서의 나의 직장생활에 그는 참 다행스러운 멘토였다.
잘생기고 키도 훤칠한 안 조장의 인생에도 파란만장이 깃들어 있다니 미처 몰랐고 그에게도 멘토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매일 야간반에서 일하고 돌아와서는 소주 한두 병씩 마시지 않고서는 깊은 잠에 들 수 없어하는 그와 가끔 술친구를 하면서 사는 이야기 나누면 가슴 깊이 간직한 내력이 따로 있었다. 자기는 지옥보다 더한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덧붙여준 것이다. 돈의 소중함보다 인생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더 알게 되었다는 사연을 그는 극히 이야기하길 꺼리다가 어느 날 속 후련히 시작했다. 이를 막역한 사이라고 하던가.
그도 원래 자기 개인 사업이 있었다. 자영업으로 아파트에 보일러 시설을 설치해주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IMF가 몰아닥치면서 믿고 맡겼던 사업파트너에게 몇억의 재산을 날리면서 그는 졸지에 빚더미에 나앉아야 했다. 결국 아내와 자식들 보기 민망해 거리에서 떠돌다가 드디어 노숙자로 전락했다. 꼭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낮에는 노숙자끼리 소주를 마셨고 밤에는 지하철 통로에서 소주박스를 얻어다 뜯어고치고 잠자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1년 넘게 생활하다가 우연하게 처남을 만나 막무가내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법이네. 손자 손녀도 있는데 다시 열심히 살면 안 되겠나?" 새롭게 일어서기를 바라는 장인 어르신과 가족식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하여 그때부터 새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빚을 무는 한편 두 아이의 한 학기에 천만여원씩 되는 학비와 잡비 마련을 위해 그는 돈을 더 벌고자 선뜻 야간반 관리를 택했고 동료들과 현장에서 무거운 일을 묵묵히 감당해왔다.
노숙자들과 얽히게 되면서 배운 술이 거의 중독성에 가까웠다. 끊을 수 없는 술 때문에 그는 다시 처갓집 어르신한테 추방령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 날은 복귀시켰고 또 어느 날은 쫓아내는 반복 속에서 그는 누구보다 사랑의 매처럼 감내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 전 장인은 타계했다고 한다.
지난 추석이었다. 며칠 전에 조상들의 산소로 벌초를 다녀온 그는 집안 어르신들이 계시는 고향으로 명절을 보내기 위해 떠나면서 우리 동료들과도 명절인사를 나눴었다. 우리가 "명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고 하자 "그럼 우리 한국은 추석이 최대의 명절이야. 그리고 나에겐 그 누구보다도 돌아가신 장인어른이 더 고맙고 애틋한 분이었지" 하고 외우는 것이었다.
이튿날 해 질 녘이었다. 안 조장이 전화로 우리 야간반 동포 동료를 다 모이게 하라는 것이었다. 지정된 장소로 조선족 동료들이 다 모이자 그가 명절 음식이라면서 술과 고기를 한 봇짐 싸가지고 와서는 들여놓았다. 뜻밖이었다. 그가 첫 술잔을 옷깃 차례로 한 잔씩을 돌렸다. 한민족의 풍속으로 큰 명절인데 고향에 가지 못하는 그 심정을 이해한다면서 늦게나마 명절을 위로한다고 전하는 그 말씀의 내면에는 장인 어르신에 대한 경중과 그로 인한 한민족의 모든 어버이들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 안받침되어 있었다. 우리한테도 큰 명절이지만 그렇다고 비싼 비행기 값을 들여가면서 국외 고향방문을 할 수도 없는 처지를 이해한다고 하던 그의 직설이기도 했다.
"안 조장님!" 다들 목이 잠겨 안 조장의 손을 잡았다. 그날 모인 조선족 동료들은 있는 음식, 없는 음식, 아껴먹던 음식을 다투어 꺼내놓았다. 삽시에 두리반은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안 조장과 함께 합동으로 우리 동료들은 중국 전통 월병과 차례 음식 앞에 고향 하늘을 향해 망일 참례를 지냈다. 그러고 나서 지나간 추석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풍성하고 즐거운 두리기를 했다.
안 조장이 있어 외롭고 쓸쓸하던 추석이 이번에는 어쩐지 더욱 서러웠다.
류일복(중국동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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