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풍류산하] 동피랑 벽화마을

동화 마을에 다녀왔다. 동네의 담벼락마다 동화 같은 이야기들이 그림으로 걸려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동피랑 마을이라 부르지만 대처 사람들은 통영 벽화마을이라 부른다. 동피랑이란 이름이 참 예쁘다. 피랑은 벼랑의 이곳 사투리다. 동쪽의 파도를 피하는 항구인 동피항이 가까이 있어서,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어원으로 굳어지고 있다.

여수 금오도는 벼랑을 비렁이라 부른다. 제주 올레길을 효시로 산책길 조성이 유행하더니 금오도 역시 해안길을 비렁길로 만들어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벼랑의 사투리는 지역마다 다르다. 전라도 지역은 엉장이라고도 하고 제주에선 기정이라도 부른다. 그 외에 비냥, 까그막, 깍아비알, 산비알 등도 벼랑의 다른 이름이다.

노르웨이로 가는 여행자들은 하나같이 피오르드라 부르는 단애를 찾아간다. 이곳 해안은 오랜 세월 동안 침식작용으로 인해 생겨난 바닷가 절벽이 관광자원이 되어 국민들을 먹여 살린다. 노르웨이에는 4대 피오르드가 있다. 송네, 하르당에르, 예이랑에르, 뤼세 등이 바로 그것이다.

송네 피오르드는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낭떠러지 옆 구불구불한 외길을 감아 돌아가야 겨우 도달할 수 있다. 또 뤼세 피오르드의 프레케스톨렌이란 해발 600m 높이의 단애 위 평평한 곳으로 가려면 2시간의 산행을 해야 한다. 난관을 거친 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동피랑은 금오도 비렁길이나 피오르드에서 볼 수 있는 깎아지른 절벽 위의 마을은 아니다. 통영 시가지와 항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마을이다. 그 꼭대기에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선의 드나듦을 감시하던 동포루(東鋪樓)가 있었다. 한국동란 이후 피란민들이 동포루 주변 고지대에 거적집과 깡통집을 지은 것이 오늘까지 이어져 달동네로 형성된 곳이다.

통영시는 이곳을 몽땅 철거한 후 동포루를 복원하고 빈 땅을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푸른 통영 21'이란 시민단체가 공원을 대신할 신선한 아이디어를 내놨다. '동피랑 색칠하기-전국 벽화 공모전'을 열기로 한 것이다. 첫해에는 미대생 19개 팀이 참가하여 철거 직전까지 몰렸던 판자촌 담벼락에 붉고 푸른 색깔의 옷을 입혔다. 달동네 시멘트 블록 '벼름박'이 순식간에 예술의 벽으로 탈바꿈했고 동피랑 판자촌은 통영의 몽마르트로 변신한 것이다.

통영시도 동포루 자리의 집 3채만 헐고 그 자리에 옛 누각을 복원하기로 했다. 복원 과정에 맨 꼭대기 집을 소유하고 있던 할머니가 '죽었으면 죽었지 비켜줄 수 없다'고 우기는 통에 할 수 없이 서민 아파트 한 채와 현금 얼마를 주고 어렵사리 동의를 받아냈다.

제주 올레길이 조성된 후에 수많은 둘레길이 생겨났거나 이에 발맞춰 많은 벽화마을이 생겨났다. 동피랑은 전국에서 첫손에 꼽히는 성공한 벽화마을이다. 현재 동피랑은 2년에 한 번씩 벽화를 새로 그린다. 첫 색칠이 시작된 후 지금까지 '동피랑 블루스' '댕큐 동피랑' '동피랑 비엔날레'라는 근사한 기치를 내걸고 계속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통영시는 이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마다 1억원씩을 쾌척하여 참가하는 아티스트들에게 온갖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행사는 세계 각국으로 알려져 프랑스와 독일의 화가들도 참여하고 있다. 2014년 프로젝트에는 프랑스 화가가 참여하여 동피랑 마을의 입구인 대형 벽면에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고 있는 호랑이 그림을 그렸다. 또 독일 화가는 입구 오른쪽 벽면에 우리의 오방색을 사용한 그림을 그려 '서양인이 그린 동양화'란 칭송을 받았다.

동피랑 벽화마을에는 열 개가 넘는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어느 골목을 들어서든지 간에 그림이 안 그려져 있는 빈 벽은 없다. 그려져 있는 그림들이 모두가 예술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들은 질릴 정도로 화려하고 또 어떤 것들은 유치의 도를 넘어 치졸하다. 나는 유치찬란한 이런 그림들이 마음에 든다. 바로 나를 닮았기 때문이다.

통영에 갈 때마다 동피랑 마을에 들러 예술에 대한 허기와 갈증을 벽화 보기로 채울 작정이다. 고샅을 한 바퀴 돌다 영혼이 컬컬해지면 곱게 화장한 예쁜 주모가 따라주는 막걸리 한잔을 마셔야겠다. 동피랑 벽화마을은 나를 '동화 속의 소년'으로 머물게 하는 힐링 힐(Healing hill)이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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