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당쟁<黨爭>의 후예

10년 전 대구 출신 작가 이인화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만든 '영원한 제국'과 최근 개봉한 영화 '역린'은 모두 18세기 후반 조선의 마지막 개혁군주인 정조시대를 담았다. 드라마 '이산'도 정조의 지난한 삶을 그렸다. 우리가 이렇게 정조 임금을 주목하고 있는 것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끝으로 당쟁(黨爭)의 역사가 막을 내렸기 때문이라면 역설일까.

분명한 것은, 정조가 죽으면서 당쟁이 사라지고 노론의 일당 독주가 세도정치로 치달으며 조선은 망국의 길을 재촉한 것이다. 당쟁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식민사관에 물든 지식인의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당쟁은 떳떳한 역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덮어놓고 당쟁을 민족의 수치요 망국의 징표로만 매도할 일 또한 아니다.

그러니 적어도 당쟁의 원인과 전개 과정을 주체적인 시각으로 살펴보는 것이 후손된 도리가 아닐까. 당쟁은 선조의 즉위와 함께 시작되었다. 훈구'척신세력을 몰아낸 사림(士林)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것이다. 겉보기에는 관료의 인사권을 쥔 이조전랑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막은 과거청산을 둘러싼 진통이었다.

기득권층에 비판적인 쪽이 동인이었고, 우호적인 세력이 서인이었다. 그런데 기축옥사(정여립 모반사건)를 일으켜 동인을 타격했던 서인이 실각하자, 옥사를 주도한 자에 대한 처벌을 두고 동인이 북인(강경파)과 남인(온건파)으로 갈라진다.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북인은 광해군을 내세운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한 소북으로 갈렸다.

인조반정으로 북인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정권을 잡은 서인은 숙종 대에 이르러 남인과 예송논쟁을 벌이며 여야의 처지가 뒤바뀌다가 노론과 소론으로 내부 분열을 한다. 남인 또한 집권기간 한때 서인에 대한 처벌의 강약을 두고 청남과 탁남이 엇갈리기도 했다. 그리고 노론은 영조 때 사도세자의 죽음을 마땅히 생각하는 벽파와 동정하는 시파로 나뉜다. 그러다 노론 시파와 남인을 가까이했던 정조가 죽자 노론 벽파의 일당독재 시대가 열렸다가, 외척의 세도정치로 붕당은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200여 년에 걸친 당쟁의 전개 과정은 대략 이렇다. 하지만 당쟁이 격심했던 시기는 숙종~영조에 이르는 50년 정도인데, 그때가 오히려 민생이 안정되고 백성이 살기가 좋았다. 당쟁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 또한 모순이다. 이제 70년도 안 되는 현대의 정당사를 보자. 보수 집권당의 계보는 독립촉성회-자유당-민주공화당-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정리할 수 있다.

야당의 계보는 훨씬 복잡다단하다.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한민당+대한민국당)-민주당-민중당(민주당 신파+구파)-신민당-민주한국당-신한민주당-평화민주당-신민주연합당-민주당(꼬마민주당과 합당)-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대통합민주신당+민주당)-민주통합당-새정치민주연합으로 연결된다. 여'야당 가릴 것 없이 몰염치한 이합집산과 무분별한 개명(改名)으로 점철된 변천사이다.

양당제가 주축인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그리고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은 적어도 100~200년 역사를 지닌다. 조선시대의 붕당도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비록 옥사(獄事)를 일으키고 환국(換局)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보복과 숙청이 없지는 않았으나, 사색당파가 자고 나면 이름을 바꿔가며 한꺼번에 얽히고설켜 이전투구를 벌인 적은 없었다.

당쟁에는 도덕적인 의리와 유교적인 명분이 있었다. 학문과 철학적인 무장을 하지 않고는 논쟁에 끼어들 수도 없었다. 오늘날 정치판처럼 도나캐나 달려들어 천지분간도 없이 서로 물고 헐뜯는 천박한 패거리 싸움은 아니었다. 무고한 양민들까지 희생양으로 삼은 서구나 일본의 총칼을 앞세운 권력투쟁과 비교하더라도 고급스러운 정쟁이 아닌가.

세월호특별법을 둘러싸고 연출한 민낯의 정치를 보라. 개헌론과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을 두고 벌어지는 행태를 보라. 조선시대보다 훨씬 더 유치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정쟁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당파싸움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역사와 조상을 탓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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