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혜영의 근대문학] 영국 할머니의 1890년대 조선 방문기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의 한국어판 책표지

64세의 영국인 할머니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조선을 방문한 것은 1894년 2월 말이었다. 영국 왕실지리학회 회원인 이 할머니는 '몽골리안' 국가의 지리와 민족적 특성 연구를 위해 먼저 일본을 탐사한 후 나가사키에서 증기선을 타고 15시간 걸려서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비숍이 도착한 1894년의 조선은 격변기였다.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청일전쟁이 모두 이해에 일어난 것이다. 이 시기 제국주의 물결 속에 영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은 식민지 개척을 위해 아시아로 진출하고 있었고, 지리학은 척후병으로서 필수적인 학문이었다. 64세 영국 할머니의 조선 지리탐사 역시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아래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조선인 하인 한 명과 함께 배를 타고 한강 줄기를 따라가면서 조선의 시골을 탐사한 이 정력적인 할머니가 보여준 활동은 경탄할 만하였다. 평균 수명이 60세에도 미치지 못하던 이 시기의 64세는 지금으로 치면 적어도 70세는 훨씬 넘은 나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할머니는 지치지 않고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야 올 수 있는 조선을 네 번이나 방문했고, 마침내 책까지 발표했다. 그 책이 '한국과 그 이웃나라'(Korea and Her Neighbours'1898)이다.

'한국과 그 이웃나라'에서 비숍은 조선의 현실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가 조선적인 풍경을 기대하고 도착한 부산은 이미 일본의 문화적 식민지였고, 경성의 도로는 분뇨 더미로 덮여 있었으며, 관리들은 부패했고, 민중은 게을렀다. 조선에 대한 비숍의 묘사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서구인의 우월감, 혹은 자만심이 강하게 개입되어 있었던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한복을 세상에서 가장 흉한 옷이라고 표현하거나, 기생의 풍류가 성행하던 평양을 소돔과 고모라 같은 타락의 도시라고 언급한 것에서 서양인, 기독교인 비숍의 편견과 독선을 느낄 수 있다.

이 시기 동양 탐사 열풍 속에서 다수의 서양인이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왔고, 그들 대다수는 비숍과 비슷한 시선으로 조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19세기 말 서양인은 2014년의 우리가 아프리카 오지의 야만적 삶을 접하는 그 심경으로 조선과 조선인을 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양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보고, 서양이라는 표준에 맞추어서 주변 문화를 판단하였다. 그들은 타 문화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없었고, 타 문화를 인정하는 데도 인색했다. 문화적 제국주의에 빠져 있던 그들이 조선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여성의 인체 곡선을 숨긴 한복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서양의 윤리와 가치가 세계인의 윤리와 가치였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개화기 조선이 받아들인 근대문물 중에는 안타깝게도 이처럼 서양 중심주의적 의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갑작스레 서양의 근대문물을 수용한 조선인에게 이 편협된 의식에서 벗어나 자문화를 방어할 수 있는 힘은 없었다. 작가들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게 볼 때, 우리의 근대문학이란 서양과 일본이 우리에게 이식시킨 끊임없는 자기부정 속에서 자기를, 자문화의 힘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혜영 대구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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