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내 인생의 멘토] <16>최수일 울릉군수-선친 최용성

도덕책 같던 선친 배고픈 어른들 보면 꼭 모셔 같이 밥상

최수일 울릉군수가 자신의 인생 멘토로 꼽는 선친의 영정사진.
최수일 울릉군수가 자신의 인생 멘토로 꼽는 선친의 영정사진.
늘 남을 배려하며 살았던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지금껏 자신이 지역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인간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고 최 군수는 말한다. 김도훈 기자
늘 남을 배려하며 살았던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지금껏 자신이 지역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인간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고 최 군수는 말한다. 김도훈 기자

최수일(63) 울릉군수는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71%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재선에 성공했다. 앞서 4선의 군의원 재임 기간 동안엔 군의장을 3차례나 맡을 정도로 동료 사이에서 신임도 두터웠다. 최 군수는 1991년 39세의 나이에 전국 최연소 군의원으로 당선될 때 가졌던 초심을 잊지 않았던 것을 비결 아닌 비결로 꼽았다. 그 초심은 최 군수가 인생 멘토로 꼽는 선친 최용성(1967년 작고) 씨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늘 남을 배려하며 살았던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지금껏 자신이 지역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인간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고 최 군수는 말한다.

◆가난 속에서 물려받은 값진 유산

최 군수는 3대째 울릉도를 터전으로 살고 있는 토박이다. 일제강점기 경주에 살던 최 군수의 할아버지가 울릉도로 이주해 터를 잡았다.

그의 유년시절은 가난했다. 대다수 울릉도 주민이 그랬듯, 다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1959년 2월 24일 경향신문은 기획기사를 통해 이렇게 보도했다. "지금 울릉도민은 오징어가 잡히지 않아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 손바닥만 한 밭뙈기라도 붙인 농민들은 하루 두 끼 강냉이감자밥으로 요기를 한다지만 오징어에 목줄을 걸었던 영세 어민들은 산에서 명이, 전호, 부지깽이 등을 뜯어다가 멀건 강냉이뜨물에 죽을 끓여 먹거나…(중략) 울릉도 아가씨들의 소원이 육지로 시집가서 쌀밥이나 실컷 먹었으면 한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 시절 최 군수의 아버지는 목수였다. 어머니는 채소 장사를 했다. 6남매를 키우는 넉넉지 못한 처지였지만, 최 군수의 아버지는 어렵게 생활하는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농산물을 팔기 위해 이른 아침 도동으로 오가는 이웃 마을 어른들이 많았습니다. 장사를 하며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잦았던 어른들을, 아버지는 그냥 지나치시지 않고 자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셨죠. 철없던 형제들이 모여 가족끼리 한 번만 식사를 해봤으면 좋겠다고 투정을 부렸던 기억도 납니다."

최 군수 아버지의 가르침은 '100번 인사하더라도 결코 넘치는 법은 없다' '늘 베풀며 살아라'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줘선 안 된다'는 식의 도덕책에 나올 법한 평범한 것이었지만, 늘 자신의 생활 속에서 몸소 실천하는 모습으로 최 군수의 가슴에 다가왔다.

최 군수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 집안 대소사에 넷째인 최 군수를 늘 데리고 다녔다. 그런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의용소방대 훈련부장이었던 아버지가 소방교육훈련 도중 고혈압으로 쓰러지면서 세상을 등진 것이다. 최 군수의 나이 16세 때의 일이다.

최 군수는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좀 더 오래 볼 수 없어 안타깝지만, 돌이켜보면 다른 형제들보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 있었기에, 남을 배려하며 살았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더 깊이 새길 수 있었다. 이것은 아버지가 물려 준 가장 큰 유산"이라고 했다.

◆울릉도의 미래를 고민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울릉도에서 중학교를 마친 최 군수는 17세가 되던 해 동경하던 육지로 떠났다. 여러 직업을 거치며 세상을 배우고 견문을 넓혔다. 그러던 중 제주도의 관광산업에 대해 알게 됐다.

"1970년대 제주도 관광산업이 지역경제 발전을 견인하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울릉도가 가난에서 벗어나 앞으로 먹고살 길은 관광산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1977년 울릉도에도 도동항에 접안시설이 들어선 이후 포항~울릉 항로를 6시간대에 주파할 수 있는 808t급 쾌속선 '한일1호'가 취항한 터여서 한 번 도전해 볼 만하다 싶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 육지 생활을 접고 울릉도에 들어온 최 군수는 형과 함께 여행사를 시작했다. 주위엔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였고, 관광객이 늘면서 여행사는 성장했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울릉도의 주요 산업이 농업과 수산업이다 보니 공무원의 관광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그런 만큼 자주 행정의 벽에 부딪혔다. 최 군수가 사업을 접고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였다.

"울릉도에 관광산업을 체계적으로 정착시켜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군의원에 몸담으면 좀 더 쉽게 지역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최 군수는 지방자치제가 부활한 1991년 울릉군의회에 입성했다. 이후 16년간 군정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다른 군의원에 비해 젊은 나이였지만 3차례나 군의회 의장을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열심히 일하며 얻은 주변의 신임 덕분이었다.

"주민의 생활 여건이 좀 더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관광 활성화를 위한 아이디어도 많이 냈죠. KBS TV 프로그램 '1박 2일'에 소개되며 울릉도를 찾는 관광객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은 해안산책로도 군의원 시절 제 머릿속에서 나온 겁니다."

◆살 만한 울릉도 만들 것

최 군수는 2006년을 끝으로 군의원 생활을 마감하고 군수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하지만 벽은 높았다. 여당이 강세인 지역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고도 낙선한 것이었다. 이후 1차례 더 고배를 마신 뒤 2011년 10'26 재보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했고, 올해 재선에 성공했다.

최 군수는 이번 재선이 다시금 초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사실 울릉도는 최 군수 이전 역대 민선군수 3명이 연이어 중도 하차한 곳이다.

직전 군수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군수직을 잃었고, 이전 군수 2명도 재직 중 뇌물을 받은 혐의로 잇따라 구속됐다. 따라서 민심은 임기를 채울 수 있는 부끄럽지 않은 군수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은 최 군수를 선택했다.

"지난 2년여의 군수 생활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아 기쁘지만, 그런 주민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아야 하기에 어깨가 더 무거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선거 이후 문득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이웃을 위한 삶을 사셨던 선친의 가르침을 새겨 군민들에게 좀 더 정성을 기울이고 진정성 있는 행정을 펼치자고 다짐했었습니다."

최 군수의 화두는 '살 만한 울릉도'다. 하늘길과 바닷길, 육상을 아우르는 전천후 교통망을 갖추는 등 주민생활기반시설을 확충하고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육성해 모든 군민이 행복한 울릉도를 만드는 것. 최 군수가 꿈꾸는 울릉군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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