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벼

"응애, 응애."

갑자기 안방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동열이 엄마가 아기를 낳은 것이다. 동열이 엄마는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내 옆에서 짚단을 묶고 있었다.

파란 하늘에 고추잠자리가 날아오른다. 아직도 한낮이면 햇살은 자전거를 탄다. 우리는 동열이네 마당에서 탈곡기 타작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락 타작은 조를 짜서 한다. 짚단을 나르는 사람, 그것을 풀어서 자아주는 일꾼, 탈곡기를 발로 밟으며 터는 두 젊은이, 턴 짚단을 묶어주는 어르신, 빈 짚단을 옮기는 아낙네, 각각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달려나갔던 동열이 여동생이 옆집 원동댁과 바쁘게 돌아온다. 방에 들어가더니 잠시 후 이가 빠진 채 타작하고 있는 마당의 동열이 아버지와 일꾼들을 향해 원동댁이 활짝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펼쳐 보인다.

오월에 모를 심었다. 새벽 네 시에 모를 찌러 나가서 해 뜰 때부터 심기 시작하여 종일 무논에 엎드렸다 펴고를 되풀이하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그래도 옆의 동료를 위하여 한 포기 더 심어 주려고 애썼다. 유월 말이면 손끝이 닳아 실핏줄에서 피가 물꼬의 논물처럼 끝없이 흘러나왔다.

칠, 팔월이면 논을 매었다. 갈맷빛 나락은 무릎께까지 자라 있었다. 호미를 들고 엎드리면 나락에서 뜨거운 열기가 훅훅 달아 올라왔다. 숨이 막혔다. 어르신네들은 한 골을 끝낼 때마다 "어~이" 하고 외치며 허리를 폈다. 뭉게구름이 잉크처럼 퍼지며 하늘을 점령하고 있었다.

한 벌, 두 벌, 세 벌 논을 매고 나면 나락이 피기 시작하고, 고추잠자리가 날았다. 벼가 가장 목마를 때다. 어젯밤에도 박연댁과 신동 어른이 물싸움을 했다. 논이 이웃해 있어서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벌어지는 연례행사이다.

한학을 하신 점잖은 선비 신동 어른의 입에서 욕설이 나오고 아이 셋을 키우며 남편도 있으나 사실상의 가장인 박연댁은 눈에 불이 켜졌다. 귀가 의심스러운 욕설들이 탁구공처럼 오고 갔다.

구월이 오며 나락의 배가 봉긋해졌다. 동열이 엄마 배도 점점 불러가며 뒤뚱뒤뚱 오리걸음을 걸었다. 그래도 논두렁 콩을 뽑는다, 고추를 딴다, 하루도 일손을 놓지 않았다. 다음 주부터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자 가을걷이가 바빠졌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지경이었다. 마당의 노적가리를 모두 타작해야 하는데 이런 사달이 난 것이다.

어느새 동열이 아버지가 대문에 숯만 매달린 금줄을 쳐놓으셨다. 타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새털처럼 가볍다.

이틀도 안 되어 동열이 엄마는 논에 다닌다. 태풍에 넘어진 나락을 일으켜 묶어주려는 것이다. 하늘은 감당 못하게 높다.

(수필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