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우아한 노년을 위하여

해마다 가을이면 경북대학교 내 유실수들은 곤욕을 치른다. 대표적인 나무가 참나무다. 도토리를 따려는 노인들의 공습이 시작되는 탓이다. 힘 좋은 영감님들이 큼지막한 돌을 들어 있는 힘껏 나무줄기를 후려갈긴다. 그러면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와 할머니들이 좋아라고 손뼉치고 환호작약하는 소리가 교정에 메아리친다. 어떤 학생은 그 소리 때문에 공부 못하겠다고 학교 게시판에 글을 올린 적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이 특정 장소에서가 아니라, 교정 곳곳에서 그것도 연례행사처럼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것을 '약탈적 노인문화'라 부른다.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1999년 여름 한철을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서 보낸 일이 있다. 어느 늦은 밤 레닌 도서관에서 귀가하다가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진기한 광경을 목도한다. 지하철 전구마저 침침했던 어려웠던 시절, 70이 넘어 보이는 쪼글쪼글하고 등 굽고 남루한 노파가 비닐백을 들고 지하철에 올랐다. 빵과 양파, 과일 등이 들어 있었다. 자리에 앉더니만 노파는 비닐백에서 주섬주섬 책을 꺼내는 것이었다. '뭐지?' 호기심이 밀려들었다. 시집이었다. 어두운 차 안에서 시인의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 감동은 잊기 어려울 것이다.

며칠 뒤 레닌 도서관 4층에 올라갔다. '아하!' 하는 경탄이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왔다. 머리 허연 노인들이 정갈한 옷차림과 꼿꼿한 자세로 좌석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저분들은 대체 뭘 하는 것일까?! 그들은 소설이나 시, 혹은 희곡 작품이나 백과사전을 필사하고 있었다. 드넓은 도서관을 가득 메운 인텔리 노인들이 사각사각 소리 내며 펜으로 정성스럽게 한 글자 한 글자 공책에 옮겨 적는 광경이라니!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때는 러시아가 몰락한 사회주의 70년 역사를 뒤로하고, 자본주의로 뒷걸음질치면서 온갖 고통으로 신음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노인들은 의연하고 평온하게 조국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과 소설가, 극작가들의 작품을 수놓듯 필사하고 있었다. 그 시기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인해 기업이 도산하고, 실직자가 급증하고, 노숙자가 생겨나던 때였다. 누구나 먹고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인해 우리나라에는 '먹고사니즘'이 무서운 기세로 판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한국 지하철에서, 그것이 서울이든, 부산이든, 대구든, 인천이든, 광주든, 대전이든, 어떤 지하철에서도 시집 읽는 노인을 본 일이 없다. 노인만이 아니라, 중년 신사나 여성이 시집 읽는 장면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청춘남녀가 시집이나 소설책을 끼고 다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으레 남의 나라 이야기이며, 대수롭지 않은 개인적 우연의 소산이라 여긴다. 그러면서도 해마다 시월이면 한국인들은 노벨 문학상을 꿈꾼다.(그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경북대에는 너구리를 비롯한 야생동물이 산다. 녀석들에게 도토리 열매는 소중한 양식이다. 도토리묵은 가까운 칠성시장에서 싼값에 구할 수 있다. 묵을 만드는 적잖은 수고로움도 덜고, 상인들에게 조그마한 도움도 되어주고, 일석이조 아닌가. 넘쳐나는 시간과 힘을 독서와 사색, 그리고 이 나라 어린것들을 위한 미래기획에 바치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런 생각이 그저 나만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우리나라에는 존경할 만한 노인이 많지 않다. 나라가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뵙고 상의하면서 해법을 구할 수 있는 지혜롭고 정의로운 노인은 어느 나라든 절실하다. 그런 노인들이 한시바삐 대거 출현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하지만 언론에는 여전히 노인 자살문제가 나온다. 집세 낼 돈이 없어서, 너무 아파서, 혹은 고독해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노인들이 여전히 많은 것이다. 우울하고 서글픈 일이다. 우리에게 우아한 노년은 아직 언감생심이란 말인가?!)

김규종(경북대 교수 노어노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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