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새내(新川)

젊어서 추억거리가 없으면 늙어 외롭다고 그러든가. 나이가 들수록 옛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진다. 대구의 비슬산에서 시작하여 시내를 거쳐 무태로 흐르는 새내(新川). 새내는 강보다 작은 시내이다.

걸음마를 떼기 시작할 때부터 새내가에서 살았다. 해질 무렵 엄마가 "하아야- 뭐어 하노, 거기는 해도 안 빠졌다 카더나"를 열 번가량 목청 높이 외치고 나서야 몇 박자 뜸을 들이고 "와아", 뭐어", "응" 하고 대답하기 고작이었고, 그러고도 반식경이 지나서 집집마다 불이 들어와 밥 때가 되어야만 아쉬운 듯 새 내를 돌아보며 집으로 돌아와 엄마의 도끼눈을 등으로 받았다.

새내에는 사계절 즐거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봄이면 쑥이며 냉이 등 들나물 캐기, 여름이면 천렵과 수영을 하고 가을에는 메뚜기 잡기, 겨울이면 또 팽이치기, 시겟또(스케이트의 일본식 발음) 타기, 연날리기. 새내는 늘 마음 좋은 옆집 아저씨 같았다. 언제나 큰 가슴을 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칠성시장에서 어물전을 하셨는데 새벽 사이렌이 울면 두 분이 리어카를 끌고 서문시장에 가서 생선을 떼 오셨다. 점심 때마다 엄마와 나는 도시락을 싸서 징검다리를 건너 아버지께 가져다 드렸다. 과일 도매상 옆에는 천막을 쳐놓고 자주 서커스며 마당극을 했는데 엄마는 콩나물 값을 아껴서 나와 함께 심청전 등을 구경하셨다.

낮이면 양철지붕 아래 집이 얼마나 덥던지 지금도 그 푹푹 찌던 열기와 지붕을 두드리던 요란한 빗소리가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가끔 기차를 타고 큰 언덕(大邱)을 지나친다. 원래는 구(丘)자였으나 공자님의 이름과 같아서 불경하다고 구(邱)로 바꿨다나.

닭이나 소, 돼지 등을 잡아먹던 땅이라고 '달구벌'이라고 부르던 도시. 덕택에 따로국밥이며 육개장, 닭발 등이 유독 맛깔스러운 동네들. 팔공산과 대덕산에 둘러싸인 사발같이 생긴 분지여서 여름엔 아주 덥고 겨울엔 오지게 추운 도시.

기차는 새내를 눈 깜짝 사이에 지나가버린다. 그리웠던 이의 마음은 나 몰라라 하고.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형이랑 메기 잡던 일, 해빙기에 얼음을 뗏목처럼 둥둥 타고 가던 일, 홍수 때 떠내려 오던 돼지며, 호박, 수박, 참외 등 먹을거리를 장대로 건지던 일, 참, 손에 닿을락 말락 하다가 놓쳐버린 그 돼지 새끼는 살았을까, 죽었을까.

한강을 건넌다. 아침 햇살에 63빌딩이 오색찬란하게 타오른다. 나도 질세라 쌍둥이 빌딩도 까치발을 하고 어깨를 겨룬다. 새내의 조잘거림도 즐거웠지만 강의 묵묵함도 믿음직하다. 하긴 그 덩치가 다르니까. 하지만 난 새내가 고향 처녀처럼 그립다. 봄의 알록달록함이, 여름의 그 찰랑댐이, 가을의 새치름함이, 겨울의 기다란 침묵이.

김여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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