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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충신' 아들 우장춘과 달리 친일 역적이 된 우범선

일제의 소위 '여우사냥'으로 1895년 10월 8일 새벽, 조선 국모 명성황후는 시해됐다. 이 을미사변에 연루된 혐의의 조선무관 출신 우범선(禹範善·1857~1903)은 우리나라에 '씨 없는 수박'을 소개한 우장춘(禹長春) 박사 아버지. 역적 아버지 범죄에 속죄하듯 우장춘은 광복 조국에서 '씨앗 독립'과 종자 자급자족에 헌신했다.

무인가문 출신으로 1876년 무과에 급제, 관직에 올라 개화정책에 눈을 뜨고 1895년 친일 정권과 일본 주도의 훈련대 창설 뒤 제2대대장에 임명됐으나 그해 10월 7일 훈련대 해산 다음 날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 역적이 됐다.

황후를 시해해 불태운 이 음모는 일본 공사관의 마쓰무라(松村濾)와 일본낭인 오카모도 류노스케 등이 꾸몄고, 친일군인으로 당시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에 포섭된 우범선과 훈련대 제1대대장 이두황(李斗璜)도 가담했다.

우범선은 미우라에게 포섭 돼 "나는 무부(武夫)다. 어떤 정견이 있을까마는 다만 조선의 정치 개선은 즉결적으로 그 당우(黨羽)를 일소하지 않으면, 비록 어떠한 고재(高才) 양책(良策)이 있을지라도 변개하기 어렵다"며 가담의사를 비쳤다. 사건 뒤 둘은 일본에 망명했고 일본인 여성 사카이(酒井仲)와 결혼, 아들 우장춘을 낳은 우범선은 1903년 오늘 자객 고영근(高永根)에게 피살, 망명지에서 최후를 마쳤다.

아들은 광복 조국에서 육종보국(育種報國)의 삶을 살다 한국에 묻혔다. 뛰어난 회사경영으로 유명한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은 우장춘의 딸과 결혼, 우범선의 손주사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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