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광장] 나라면 어떨까?

어떤 논문보다도 사회복지의 정신을 실감 나게 전해준 책이 한 권 있다. . 일본 기후현에 위치한 노인종합케어시설 가 1976년부터 해온 노인돌봄사업의 경험과 변화를 담은 책이다. 입소한 노인들에게 환자복을 입히고 업무 편의 중심으로 서비스하던 곳에서 어떻게 '존엄을 생각하는 케어'가 정착되었을까? 비결은 체험을 통한 역지사지(易地思之)에 있었다.

기저귀를 찬 상태에서 배설하는 체험 그리고 눈을 가린 상태에서 다른 사람이 떠먹여 주는 식사를 하는 체험. 이곳에서 일하게 되는 직원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체험실습이다. 노인의 입장에서 통상적인 서비스를 받아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직원들은 기저귀에 배설해야 하는 성인이 가지는 불쾌감과 모멸감, 그리고 기저귀를 다른 사람이 갈아줘야 하는 과정을 견뎌야 하는 수치를 몸으로 기억하게 된다.

식사도 마찬가지다. 내 입으로 무슨 음식이 들어올지 모르는 상태로 밥을 받아먹을 때 식욕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싫어하는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식사의 즐거움을 압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서비스 당사자가 되어본 이들은 자신이 체험한 불쾌감과 모멸감, 불안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게 된다고 했다. 내가 존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돌봄 서비스가 정착하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사회복지는 도와주는 일이다. 빈민에 대한 복지급여건, 실업자에 대한 고용훈련과 실업급여건, 장애인에 대한 활동지원서비스건, 노인에 대한 연금과 장기요양서비스건 모두 당사자의 급박한 어려움에 대한 도움이다. 하지만, 이들 정책과 서비스가 형성되어온 과정에는 사회구성원 전체를 운명공동체로 보는 연대의 정신, 운명공동체가 추구하는 평등주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 너의 불행과 어려움은 어제 나의 것이었을 수도 있고, 내일 나의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복지급여와 서비스가 제공되는 과정과 결과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당사자의 존엄성'이다. 의 체험실습은 사회복지에서 존엄성이 '만약 나라면'이라는 간단한 역지사지를 통해 실현되는 하나의 사례를 보여준다.

이런 시각에서 지난 11월 서울 곳곳에서 열린 '김장나누기' 행사를 보면 불편한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한 기업은 올해 열두 번째로 '김장나누기' 행사를 벌였는데 서울광장에서 2천 명이 넘게 모여 140t의 김치를 만들었다. 해마다 모이는 사람 수와 만드는 김치의 양으로 기록을 새로 세우는데 또 신기록이라고 했다.

한편 잠실에서 열린 '국민행복 김치나눔축제'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국회의원, 국내 50여 개 기업이 주축이 되었다. 배추 소비를 촉진하여 농가에 도움을 주고 '사회취약계층'에 김치를 나누어주는 '상생'이라고 했다. 국민연금공단도 본부직원 100여 명이 1천 명분 김장을 해 전국 102개 지사로 발송했으며 한국필립모리스도 영등포공원에서 결혼이주여성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김장김치를 담갔다는 기사도 이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엄청난 양의 김치는 '사회취약계층', 곧 '홀몸노인', '저소득층', '사회복지시설'에 전달될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 행사들을 개최한 사람들이 자기 가족 밥상에 오를 김치도 같은 방식으로 만들고 싶은지 묻고 싶다.

나? 겨우내 먹을 김장을 서울 한복판에서 수천 명과 함께 하고 싶진 않다. 그래서 다른 누구의 밥상에 오르는 김치도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에 달갑지 않다. 정말 누군가의 김장김치를 만들어 드리고 싶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과 우리 자신을 존중하는 방식일까?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모두 '나라면 어떨까?' 생각해보자. 그래도 모르겠으면 당사자에게 물어보자. 가난한 가족의 밥상, 홀몸노인의 밥상, 사회복지시설의 밥상에 오를 김치라고 당사자들에게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만들어 전달하는 시대와는 작별해야 하지 않을까?

양난주/대구대 교수·사회복지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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