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 저무는 한 해를 바라보며

디지털종족과 아날로그종족

어느덧 12월이다. 한 해가 또 이렇게 저문다. 거리에 구세군 종소리 들리고 성탄 트리도 반짝인다. 그 많던 크리스마스카드와 캐럴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구두닦이 소년과 엿장수 아저씨와 연하장 그려 팔던 예쁜 소녀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가수 이선희가 부른 '아, 옛날이여'마저 노래방 기기나 스마트폰으로 만나는 시대. 디지털 기기 속으로 들어간 게 어디 한둘이랴. 세상 참 빠르게 변한다. 손안의 스마트폰 속으로 세상은 몸을 꾸기며 들어간다. 잠깐 사이다. 세상은 천지개벽하고 우리는 어리둥절해진다. 변화의 속도가 가속되기 때문이다. 인류의 지식 총량은 73일마다 두 배씩 늘어난다는 보고도 있다. 너무 빠르다. 디지털종족들은 생존가능성이 높지만 아날로그종족들은 생존경쟁에서 뒤처지게 마련이란다.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의 논리가 디지털 진화론을 만든다.

그래도 오늘은 잠시 아날로그식 삶이 그립기도 하다. 회룡고조(回龍顧祖). 먼 길 달려온 산줄기가 제 온 곳 돌아보듯 잠시 지나온 시간 생각해본다. 조금 있으면 언론들은 올해의 10대 뉴스를 경쟁하듯 발표할 것이다. 그러면 시민들은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시간 열차 속에 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지나간 사건의 풍경들은 이제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내게서 떠나 허공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럴수록 '오직 지금'만이 존재의 빛나는 전제임이 절실해진다.

배회족과 질주족

가만히 내게 물어보니 내 삶의 진짜 주인은 속도로구나. 무리지어 달리는 말들처럼 나 역시 그 대열에 끼어 질주해왔지. 시간의 바람은 무서운 속도로 휙휙 지나가고 붙잡아달라는 손들 이루 다 잡을 수 없었네. 그렇게 됐어. 갑오년 올 한 해, 바쁘다는 말 입에 달고 살아온 건 분명하다.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니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이 땅의 허망한 죽음들이며 숨 가쁜 삶들은 망각의 저녁 강 속으로 점점 가라앉아 가는구나. 세월호의 꽃다운 생명들, 분신한 아파트 경비원, 고독사한 옆집 할아버지, 직장 구하지 못한 늙은 청년들, 거리에 어슬렁거리는 부익부 빈익빈의 유령들.

그래도 좋아, 나도 좀 바빠 봤으면…. 노동열차를 놓친 '배회족'들은 오늘 저녁노을이 더욱 검붉고 처량하다. 그들 식탁엔 매번 불안과 초조가 올라오지. 질주해도 좋아. 난 지속적인 속도가 필요해…. 그들은 의자에 앉아서 가상의 속도를 꿈꾸며 2천 원이나 오른 담뱃값 걱정을 잠시 잊는다.

탑승에 성공한 '질주족'도 행복하지 않다고 투덜대기는 마찬가지다. 나 역시 비슷하지 않은가. 목표와 성과의 기관차에 올라타 전력질주만 했을 뿐 잠든 아내 흰 머릿결 이제야 세어본다. 오늘도 늦네요, 카톡 문자만 그 몇 번이던가. '해마다 해마다 꽃은 피어 그 모습 비슷도 하건만, 해마다 해마다 사람의 모습은 같지가 않구나'(年年世世花相似 世世年年人不同). 세월의 무상함과 나이 드는 서글픔 노래하는 당시(唐詩)의 빛나는 명구 비로소 실감하니, 내 근본의 팔 할이 시간이란 걸 불현듯 알겠구나. 해서, 저무는 해 우두커니 바라보며 나는 시간을 스케치해보는 것이다.

오직 지금뿐

시간은 정직하다. 배회족이건 질주족이건 그들 몫만큼의 시간은 정해져 있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남은 인생에서 제일 젊다. 앞으로는 젊음의 그림자가 점점 짧아진다. 그러니 소중한 것은 오직 지금뿐. 그림자가 몽당연필처럼 짧아져 스러져 가는 데 지나온 기차역에서 만나지 못한 그녀를 애달파한들 무엇하리. 여기 3차원 우주에서 과거는 바꿀 수 없는 것. 오직 지금만이 존재의 전부. 지나온 지금은 과거이고 다가올 지금은 미래인 것이다. 배회족도 질주족도 속도와 싸우는 게 아니라 오직 지금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좋은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 먹는 것이 행복'이라는 아주 매력적이고 실제적인 행복의 정의이자 실현이다. 한 해가 저문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좋은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자.

윤재웅 동국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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