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에 가면 가장 먼저 효대(孝臺)에 오른다. 오르는 길목에 문, 전각, 석등, 석탑이 즐비하지만 안중에 두지 않고 효대로 올라간다.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가 절간으로 내려오실 이유는 없지만 내가 당신을 만나러 그곳에 간다는 것을 알면 오기 싫어도 오실 것이다.
효대는 효를 상징하는 지극한 사랑의 공간이다. 그래서 백팔 계단 위에 그리 크지 않은 평평한 대지를 마련하여 석탑과 석등을 배치하고 그 속에 아들을 사랑하는 한 어미와 장성하여 승려가 된 아들의 이야기가 석물 조각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 갈 때마다 석탑과 석등 속에 갇혀 있는 두 모자의 무언극이 소극장 무대에서 남녀 배우가 전해주는 메시지보다 훨씬 더 강한 진동으로 다가와 감동과 충격을 동시에 받곤 한다.
544년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일반적으로 출가한 승려들은 초발심이 흐트러질까 봐 세속의 피붙이들과의 인연은 끊어버리는 게 상례다. 그러나 연기조사는 절을 짓고 난 후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모셔와 아침마다 따뜻한 차를 공양했다. 스님의 효행이 입소문을 타고 산문 밖으로 전해지자 신도들이 그를 칭송하고 더욱더 흠모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대중들의 마음이 모여 모자의 효와 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두 개의 석상을 세우게 되었다.
어머니 상은 커다란 석탑 안에 서서 아들인 연기조사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하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아들인 승상은 맞은편 자그마한 석등 안에서 무릎을 꿇고 어머니께 찻잔을 올리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모자간인 두 사람은 그냥 그렇게 서 있을 뿐 아무 말이 없다. 말하지 않는다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침묵이 달변 너머에 존재하듯 두 모자 사이에는 말씀과 말씀의 봇물이 흘러넘치고 사랑과 믿음이 강물로 흘러가고 있다.
석등 속의 공양상이 연기조사란 것은 조선조 때 화엄사에 들른 남효온(1454~1492)이란 사람이 화엄사를 소개하는 어느 승려에게 들은 이야기가 퍼지면서 기정사실로 되어 갔다. 그러나 문헌으로 증명된 바가 없고 오히려 석탑 속의 어머니상으로 알려진 조상은 여성이 아닌 남성에 가까운 모습이어서 전해오는 속설을 뒤집어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또 석탑 안에 서 있는 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가 아니라 도선(道詵, 827~898) 국사의 어머니라고 알려진 적도 있었다. 17세기 학자이자 여행가였던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이 1686년 화엄사에 들렀을 때 한 스님이 그렇게 말하더라는 얘기가 그의 '산중일기'(山中日記)에 적혀 있다. 고려시대 화엄사를 중창한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은 효대에 자주 올라갔던 감회를 '지리산 화엄사에서'란 시로 남기기도 했다. "적멸당 앞에는 훌륭한 경치도 많고/ 길상봉 꼭대기엔 티끌 한 점 없어라/ 종일토록 방황하며 지난 일 생각하는데/ 어슴푸레 어둠 내린 저녁 슬픈 바람 한 줄기가 효대를 스치누나"(寂滅堂前多勝景/ 吉祥峰上絶纖埃/ 彷徨盡日思前事/ 薄暮悲風越孝臺)
나는 남도여행을 마치고 귀로에 오를 땐 길이 좀 멀더라도 화엄사 효대에 들러 어머니를 만나고 지리산 성삼재를 넘어 집으로 돌아온다. 이상한 것은 효대에 오를 때마다 나의 머릿속에서 꾸며지는 공간과 인적 배치가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어떤 때는 연기조사와 그의 어머니는 간곳없이 사라져 버리고 대신에 스님이 앉아 있던 석등 속엔 내가 들어가고 석탑 속엔 교회의 권사였던 어머니가 혀를 껄껄 차며 냉담 신자인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을 때도 있다.
또 사하촌 주막에서 막걸리라도 한잔 마시고 기분 좋게 올라가는 날은 효대가 살아 있는 뮤지컬 무대로 바뀔 때도 있다. 각황전 뒤 언덕길의 소나무와 동백들이 관객들로 변신한 가운데 연기조사가 따뜻한 차를 끓여 어머니께 올리는 다례가 펼쳐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장면이 바뀌면 어김없이 어머니와 내가 주인공이 되어 어머니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아들에게 꾸짖는 역할을, 아들인 나는 된통 당하는 역을 맡았다가 한낮의 꿈은 깨져버리고 만다.
어머니가 떠나신 지 어언 십오 년. 요즘은 꿈속에서도 쉽게 만나 뵐 수가 없다. 혼백이 내 주위에서 더 이상 머물 수가 없는 저승보다 더 먼 곳으로 떠나셨는지 묘소를 다녀온 그날 밤에도 감감무소식이다. 손주 녀석들이 할아버지라 부르는 이 나이에도 나는 아직도 어머니가 그립다.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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