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시즌과 연말이 되면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크리스마스 실(seal)'이었다. 크리스마스 실은 연말, 나눔과 소통의 분위기를 더했다. 실을 사면 결핵퇴치를 위한 결핵협회의 기금 마련에 동참할 수 있고, 카드나 연하장에 한 장씩 붙여 서로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도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크리스마스 실이 위기에 봉착했다. 손으로 쓴 크리스마스카드가 줄고 결핵예방법이 개정되면서다. 그렇다고 크리스마스 아이콘 자리를 내어준 것은 아직 아니다. 나름의 돌파구를 찾으며 크리스마스 대표 아이콘의 위상을 지키려는 크리스마스 실의 발자취를 그려봤다.
◆크리스마스 실과 함께한 추억
크리스마스 실에 대한 추억을 묻는 질문에 다들 학창시절을 떠올렸다. 정부기관과 공공단체에 실을 할당 판매할 수 있는 '결핵예방법'을 근거로 주로 학교에서 실 구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강매'라는 불만이 나오기도 했지만 덕분에 실과 관련된 추억거리는 누구나 하나쯤 가질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실은 누군가에게는 수집의 대상이었다. 김세은(27) 씨는 우표를 모으던 아버지를 따라 자신도 무엇인가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연말마다 판매하는 실을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기부하는 건 줄도 모르고 그냥 모은다고 생각하니 마냥 재미있었죠." 실 수집은 김 씨의 학창시절과 함께 막을 내렸지만 김 씨는 지금도 모아둔 책을 꺼내보곤 한다. "신기하게도 실을 보면 그 해에 나한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오르기도 해요."
정재민(31) 씨에게 크리스마스 실은 따뜻한 연말 분위기를 더해주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카드를 많이 썼잖아요. 학교에서 매해 실 두 장씩을 사서 카드를 쓸 때마다 붙여 보냈어요. 은근히 기부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자랑하고 예쁜 캐릭터로 카드를 꾸밀 수 있어서 좋았어요."
'실'하면 다채로운 디자인을 빼놓을 수 없다. 김지연(46) 씨는 "1년마다 나오는 독특한 디자인들을 구경하는 크리스마스 실을 보는 재미"라고 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예쁜 디자인이 나오면 꼭 샀어요. 개인적으로 2009년 김연아 실을 제일 좋아해요."
◆크리스마스 실이 걸어온 길
크리스마스 실은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 덴마크의 한 우체국장이 처음으로 생각해냈다. 당시는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이 결핵으로 목숨을 잃을 때였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작은 마을 우체국장 아이날 홀벨(Einar Holboell)은 이를 해결할 방법을 쌓여 있는 우편물에서 찾았다. 그는 성탄절마다 쌓이는 우편물에 우표 값 정도의 실을 붙여 그 기금으로 결핵퇴치에 쓰면 어떨까 생각한 것이다. 당시 덴마크 국왕은 그의 청원을 들어 그해 12월, 모금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후 전 세계로 확산한 크리스마스 실은 오늘날까지 결핵퇴치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 크리스마스 실이 들어온 때는 1932년 일제강점기 때였다. 우리나라에 크리스마스 실을 뿌리 내린 사람은 캐나다인 의료선교사 셔우드 홀(Sherwood Hall) 박사다.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최초의 실에는 숭례문이 그려져 있다. 셔우드 홀은 우리나라 최초의 실인 만큼 한국인의 호응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거북선을 소재로 했지만 당시 일제가 허가하지 않아 결국 숭례문으로 바꾸게 됐다.
크리스마스 실의 소재가 되는 그림에는 시대별 흐름이 있다. 발행 초기에는 '널 뛰는 소녀'(1935), '민속놀이'(1964)처럼 전통적인 의미를 살린 그림들이 주로 등장했다. 그러다 1980년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등 국제대회를 개최하면서는 이를 기념하는 운동경기들이 소재가 됐다. 1982년에는 올림픽 개최국 선정을 기념하기 위해 올림픽 경기 10종목을 실 주제로 선정했고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이 주제였다. 이때는 특히 88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돌이 작가로 유명해진 김현 씨가 도안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최근에는 크리스마스 실 수요가 줄면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는 캐릭터나 인물이 소재로 사용된다. 2009년 '김연아 파이팅 이모티콘'과 2011년 '뽀로로와 친구들이 함께하는 겨울 스포츠' 등이 그 예다. 정현진 대한결핵협회 대구경북지부 운영지원과 과장은 "뽀로로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어 더욱 실을 찾는 손길이 많았다"고 말했다.
◆내리막길 걷는 크리스마스 실
크리스마스 실은 최근 위기에 봉착했다. 손으로 쓰는 크리스마스카드가 줄고 또 정부기관과 공공단체 등 의무적으로 구입하던 단골들이 떨어져 나갈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최근 보건복지부는 크리스마스 실 모금의 허가와 협조 의무 규정을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결핵예방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입법예고했다. 개정 법안에는 '정부 각 기관, 공공단체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법인은 크리스마스 실 모금에 협조해야 한다'는 규정이 삭제될 예정이다.
개정된 법은 내년 하반기부터 시행되지만 고난의 길은 이미 시작됐다. 협회 관계자는 "아직 법안이 시행되지도 않았는데 공공기관에 판매 협조를 부탁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라며 하소연했다.
더 이상 손으로 쓴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지 않는 시대 분위기도 실 판매의 내리막길에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 문혜동 대한결핵협회 대구경북지부 본부장은 "최근 온라인 메신저를 통해 빠르고 간편하게 메시지를 보내면서 크리스마스 실의 역할이 줄고 있다"며 "옛날에는 카드에 크리스마스 실을 붙여 따뜻한 분위기를 더 느낄 수 있었는데 아쉽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크리스마스 실이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은 아니다. 대한결핵협회는 확대 모금 운동을 펼치기 위해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 중이다. 송하만 대한결핵협회 홍보과장은 "현재 인터넷, 모바일 실은 서비스되고 있지 않지만 온라인쇼핑몰을 통해 실을 구입할 수 있다"며 "이모티콘과 연계해 실을 홍보, 판매할 수 있는 방법을 구상 중에 있다"고 말했다.
김의정 기자 ejkim90@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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