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터키군은 1950년 10월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1만4천936명을 한국으로 파병했다. 이는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 규모의 참전 병력이었다. 한국전에서 사망한 터키군은 765명이고, 부상자는 2천147명, 행방불명된 사람은 175명, 포로는 346명, 비전투 요원 손실은 346명, 부산 유엔묘지에 안치된 유해는 462구이다.)
필자는 터키와 시리아가 국경을 접한 코바니 부근으로 전쟁을 취재하려고 갔다가 그 지역의 쿠르드인들로부터 아주 충격적인 정보를 들었다. "한국전에 참전한 병사들 중에 60%가 쿠르드인들이었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 사실을 그냥 우스갯소리로 넘길 수만은 없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쿠르드당의 간부였고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몇 년 전에 작고한 쿠르드 참전용사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근거까지 제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이 벌어지는 코바니의 국경지대에 갔다가 그곳에서 코바니에서 싸우는 쿠르드 젊은이들을 응원하려고 나온 한 청년(에르한 투란)을 만났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했던 첫마디가 바로 "나의 삼촌(메흐멧 투란)은 한국전에 참전한 용사였다"는 말이었다. "이미 6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삼촌이지만 살아있을 당시에는 언제나 한국에 대해 자랑스럽게 얘기했다"고 말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한국인들이 터키를 형제국가로 부르는 가장 큰 이유는 6'25전쟁 때 세 번째로 많은 군대를 파견해서 피를 흘렸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터키가 보낸 군인 중 많은 군인이 쿠르드민족으로 이뤄져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쿠르드민족은 4천만 명의 인구가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네 개 국가에 집중적으로 나뉘어 살고 있다. 터키에만도 터키 전체인구의 25%인 2천만 명 이상이 쿠르드인으로 이뤄져 있고 지금도 터키의 동부지역에 대다수 인구가 집중해서 살고 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땅인 이 지역에는 역사적으로 수천 년 전부터 쿠르드민족이 살아왔다. 지금은 사실상 터키의 식민지로 쿠르드민족의 고유한 문화적 권리가 철저하게 탄압받아 왔고 터키의 깃발 아래 모든 역사적 사실이 묻혀 왔다. 당연히 한국전에 참전해서 피를 뿌렸던 쿠르드 용사들은 터키의 깃발 아래 모든 게 묻혀버렸고 영광은 터키가 독차지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필자는 한국전에 참전한 터키군의 60%가 쿠르드 용사들로 이뤄졌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한국전에 참전했던 쿠르드 용사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곧 가지안텝시에서 소식이 날아들었다. 한 쿠르드인이 한국전에 참전했던 쿠르드 참전용사를 알지만 몇 년 전에 세상을 등졌다는 것이다. 필자는 살아있는 쿠르드 참전용사를 만나기를 원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다.
전쟁이 한창인 코바니시의 맞은편 도시 수르츠시에 와서 쿠르드인들로부터 쿠르드인 대부분의 수명이 65세를 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이후 참전용사를 수소문하는 일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최연소자라 가정해도 80세가 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쨌든 수르츠지역에 머물면서 한국전에 참전한 쿠르드 용사를 찾는다는 말을 계속 퍼뜨렸다.
며칠 뒤 변호사인 일리야스 바란에게서 갑작스러운 희소식이 들렸다. '찾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살아있는 참전 용사를 두 사람씩이나! 사실 바란이 찾아낸 쿠르드 용사들은 모두 열 명이었으나 여덟 명의 노병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리고 대도시인 우르파시에서도 약사인 손자가 자신의 할아버지의 한국전 참전을 기리려고 약국 간판을 '코레약국'이라 붙여놓았다는 소식도 가져왔다.
1. 케말 압데
쿠르드인 변호사 바란이 찾아낸 쿠르드 노병은 마을 이름만 있고 번지수도 제대로 없는 농촌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마을 이름과 노병의 이름만 들고서 우리 일행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우리 일행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에게 "코레아"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금방 눈치를 채고 맞은편에 있는 참전용사의 집을 가리켰다. 허름한 시골집으로 들어서니 팔순이 돼 보이는 용사의 아내가 우리 일행을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는 그의 젊었을 때의 사진과 훈장, 메달을 보여줬다. 낡은 메달에는 여전히 선명하게 'KORE'(코레'한국)라는 글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밭에 나가서 일하고 있는 그를 마을 사람이 달려가 불렀는지 금방 집으로 돌아왔다. 노병은 대문에 들어서면서 필자를 보자마자 "영등포!"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여든 살의 나이에도 그의 행동거지나 목소리는 청년이나 다름없었고 여전히 왕년의 군기가 살아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 웃었다. 일행은 영문도 모른 채 나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영등포와 서울, 인천, 부산"을 다시 힘차게 외쳤다. 6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이 말들은 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있었다. 한국인인 나를 보자마자 그동안 가슴속에 쌓여있던 한국이 터져 나온 것이다. 또 다른 한국말을 기억하는지를 묻자, "이리 와!"라는 말을 외쳤다. 내가 통역을 하자 좌중은 다시 웃음바다로 변했다.
그의 이름은 '케말 압데'(터키식 이름은 케말 하이마제)이며 1932년생이다. 곧 그는 그의 아내가 들고 온 두 개의 한국전 참전 기념메달을 가슴에 달았다. 잠시 후 그와 60년이 지난 과거로 여행하기 시작했다. 한국사람으로는 필자를 처음 대한다면서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렇게 잘산다는 한국에서 지금까지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다"면서 서운함을 드러냈다.
그리고 현재 전쟁 중인 코바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당장 코바니로 달려가서 싸울 텐데, 늙은 게 죄다. 지금 코바니에서는 쿠르드 젊은이들이 인류의 적인 이슬람국가단(IS)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지만, 어느 나라도 제대로 지원해 주지 않고 있다. 많은 쿠르드 병사들이 전쟁 때 한국에 가서 희생하면서 한국을 지켜줬는데 왜 한국은 쿠르드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나? 지금 쿠르드민족은 한국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는 어렸을 때 제대로 학교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단지 쿠르드어만 할 줄 알았지 터키말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18세가 되자 터키의 법에 따라 터키군에 징집될 수밖에 없었다. "터키말은 한국에 가서 배우기 시작했다"면서 터키말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을 터키군에 징집한 터키정부를 맹렬히 비난했다.
"터키의 '볼루'시로 징집돼 군사훈련을 3개월 받다가 한국으로 보내졌다. 당시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었고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우리에게 한국전에 참전하는 데 동의하는지를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고 강제적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처음 한국에 보내질 때만 해도 우리 부대의 쿠르드 병사들은 거의 터키말을 할 줄 몰랐고 터키말은 한국에 주둔하면서 배우기 시작했다"는 놀라운 사실도 밝혔다. 케말과 함께 "거의 6천 명의 병사들이 보내졌는데 당시 대부분이 쿠르드 병사들이었고 10% 정도만 터키 병사들이었다"고 회상했다. 케말을 비롯한 쿠르드 병사들과 터키 병사들은 부산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훈련을 다시 받았다.
하영식 객원기자(국제분쟁 전문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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