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세정의 대구, 여성을 이야기하다] 김울산 여사

복명학교·희도국민학교 창립 도와 청빈한 삶 살면서 '통 큰 교육기부'

▲김울산 여사
▲김울산 여사

'대표 인물이 없다.' 근대 이후 대구 여성계를 두고 하는 말들이다. 하지만 정작 여성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런 인물을 찾고, 또 현창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대구시교육청이 2014년 앞장서 알린 김울산 여사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이다. 김울산 여사의 삶이 이처럼 대구 사회에 늦게 알려진 것은 어쩌면 그의 출신 때문일 수도 있고, 여성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김울산(1858~1944) 여사는 울산 출생으로, 16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 된다. 대구로 시집왔지만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향'이라는 이름의 관기가 되고 만다.

그녀는 정미소와 술집을 경영하면서 돈을 모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삶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흥선대원군과 가까이 지내면서 하사받은 땅이 상당했다는 설이 있다.

김울산은 지금의 섬유회관 건너편 뒤쪽 하천 부근에 살았다고 한다. 홍수 때 하천이 범람해 주민들이 재난을 당하자, 사재로 둑을 쌓고 이재민을 구휼했다. 흉년이 든 해에는 쌀 2천 석을 내놓았다고 하니, 남자도 쉽게 흉내 못 낼 진정 여장부의 배포를 지닌 분이다. 반면 자신에게는 극도로 인색했다고 한다. 문풍지가 찢어지면 헌 종이를 덧바르고, 빗자루도 몽당빗자루가 될 때까지 사용했다.

김울산 여사는 '교육 기부의 어머니'로 불릴 만큼 교육에 통 큰 기부를 한다. 1930년대 대중잡지 '별건곤'에는 이렇게 전해진다. "아미산이라면 성 밖이다. (중략) 그 언덕에 기와로 힘차게 앉은 것이 '사립 복명보통학교'와 '복명유치원'이다.(중략) 교주 김울산은 노인이다. 검소하기 짝이 없다. 누가 보든지 남의 심부름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 의복을 입고 다니는 부인이다. 10만원의 사재 전부를 아낌없이 내놓고 육영사업에 한없는 재미를 붙여 이따금 학교에 나와서 손자 나이의 학생들이 장난하는 것을 보고 저녁이면 기쁜 마음으로 돌아간다."

그의 기부 행위에 대한 기사는 이처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김울산은 1874년 순도학교를 설립했고, 순종의 대구 방문 때 받은 하사금과 지방 유지 기부금, 자신의 재산으로 복명보통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의 창립을 도왔다. 1925년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명신여학교를 인수해 복명학교로 개칭했다. 이 밖에도 대구 최초의 초등학교인 '희도국민학교'를 세우고 1천원을 기부했고, 대남학교 유치원 설립에도 동참했다. 대구부가 도로를 닦을 때 많은 땅을 희사하는 등 총 37회에 걸쳐 사회사업에 헌신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구교육청은 김울산 여사를 기리기 위해 그의 생애를 다룬 뮤지컬을 공연하기도 하는 등 업적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김울산 여사에 대해 연구한 김중순 계명대 교수는 논문에서 "당시 대구의 여성 교육을 이끈 학교들이 대개 선교사가 세웠거나 일본인들이 세운 것인 데 비해, 김울산 여사의 복명학교는 명실상부 대구 여성들이 자력으로 세운, 교육에서도 차별을 받았던 조선의 아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이라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대구여성가족재단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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