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부엌 창은 뒤뜰을 향해 열려 있다. 그 창으로 어둠이 부스럭거리고 멀리 산들이 구름처럼 떠났다가 돌아오기도 하며, 마치 누군가의 뒷모습처럼 촉촉함을 오래 머금고 있다가 나의 새 아침이 되어 주기도 한다. 그 창문 덕분에 부엌에 있는 시간 동안 뒤뜰에 매혹되곤 했다. 뒤뜰에는 오래된 탱자나무가 울타리처럼 서 있는데 오늘 아침 유독 눈에 들어왔다. 이사 오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탱자나무가 눈을 맞춘 지 10년이 넘었는데 하필 나의 창을 처음으로 서성이는 낯선 눈동자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하던 설거지를 멈추고 자세히 바라보니 누르스름하던 탱자나무 가시가 어느새 푸르스름한 새 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라서 곧 부러질 것만 같았는데, 눈치 빠른 푸른 햇살이 그 위에 살짝 걸터앉아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유리문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사이 저들은 부지런히 봄빛을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일까.
오래전 누군가 뒤뜰에 이 나무를 심은 이유는 탱자나무 가시가 집으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지켜 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믿음이 어둑한 뒤뜰을 지금껏 지켜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시는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는지 새들의 지저귐이 그 곁에서 하루를 시작하는가 하면, 어떻게 뚫고 들어갔는지 고양이도 낮잠을 그곳에서 즐기곤 한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 늦은 눈발도 탱자나무 속으로 내렸고, 지난여름 넝쿨들도 가시에 업혀 지나갔다. 덤불을 쪼는 새에게는 먹이가 되어주고, 여린 눈발에는 바람막이였다가 넝쿨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어깨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탱자나무 가시는 밖으로 자라는 손톱이 아니라 안으로 파고드는 뿌리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추위가 오기 전 나도 가시 곁에서 흰 꽃을 따고 탱자를 주운 적 있다. 그 흰 꽃은 책갈피 속에서 또 다른 봄에 올 새 꽃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 탱탱한 알은 시들해졌지만 만지고 난 손에는 아직 향기가 알싸하다. 마치 수도 없이 찔려본 향기 같다. 가시가 제 살을 파고드는 동안, 당신이 나에게 자주 들리지 않는 걸 보면 내 몸에는 뾰족함이 많은가 보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나도 모르게 밖으로 밀어 보낸 것들이 오늘 아침을 창 앞에 오래 머물게 한다.
뒤뜰의 저 푸른 가시는 햇살을 감아 흰 꽃을 걸고 짐승의 눈을 닦아 둥근 열매를 매달 것이다. 이제 곧 가시는 더 푸른 가지로 한 채의 집이 되어 뒤뜰을 지켜 줄 것이다. 뾰족하지만 날카롭지 않은 그 마음을 닮고 싶어, 호주머니 속에서 삐져나오는 것들에 손끝이 찔린 아침이다. 입춘의 제법 도톰해진 햇살이 창을 어루만지고 있다. 그동안 껍데기처럼 말라가던 마음으로 기지개를 켜 본다.
이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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