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수(49) 변호사는 여군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1991년 여군법무관 시대를 연 뒤 군사법원장, 고등검찰부장, 법무실장 등 육군의 핵심 법무직책을 여군 최초로 수행했다. 2011년 여군법무관으로는 처음으로 장군이 됐다. 지난해 말까지 2년 동안 여군 최초로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을 지냈다.
이 변호사는 "군사법원은 판결을 통해 군 기강을 확립하지만, 장병의 인권도 보장해야 한다"며 "법무관 시절 군 기강 확립과 인권보호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애썼다"고 말했다.
경북 구미의 산골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줄곧 장학금을 받으며 부모님의 학비 부담을 덜어줬다.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그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여군법무관으로 임관, 11군단 군판사를 시작으로 군 요직을 두루 거치며 일사천리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아픔이 있다. 남편이 10년 전 불혹의 나이에 딸 하나를 남기고 지병으로 숨진 것이다. 특히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는 어머니를 줄곧 돌봐오던 아버지가 자신의 전역 3개월을 앞두고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가셨을 때는 아픔이 너무 컸다. 연평도 해전 직후인 2011년 군내 분위기상 자신의 장군 취임식에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데 이어 철석같이 약속했던 지난 연말 전역식에도 모실 수 없었다. 이 변호사는 전역식장에서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시골에서 평생 안 입고, 안 먹고 4남매를 키워오셨는데, 이제 좀 편하게 해드릴 수 있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자랐나.
▶부모님이 벼농사와 함께 참깨, 고추농사를 지으며 2남 2녀를 키웠다. 논밭이 15마지기가량인데 4남매를 키우기에 벅찼다. 장녀이기 때문에 학교 다니면서 부모님에게 학비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인근 동네 출신인 삼천리자전거 회장이 선산군에 장학금 1억원을 내놓은 덕분에 매년 1차례씩 형편이 어렵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이 지급됐다. 또 고향 출신의 재일교포도 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학교에 장학금을 내놓았다. 또 고교시절에는 전교 10등 안에 들면 수업료가 면제였다. 결국 2곳의 장학금과 수업료 면제를 포함해 중'고교 시설과 대학 때는 부모님에게 거의 학비 부담을 드리지 않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법무관이 꿈이었나.
▶어릴 때에는 의사나 과학자 등 이과계통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오상고 시절 여학생이 2개반, 남학생이 4개 반이었는데, 여학생 반은 아예 이과가 없었다. 대학 진학 때 이과를 가게 되면 동일계 가산점이 있어 10%를 손해 보기 때문에 부득이 문과를 선택했고, 법대를 졸업한 고모부의 권유로 경북대 법대에 입학했다. 대학 4년 때 사법시험 1차와 군법무관 시험 1차에 합격했지만, 이듬해 사법시험 2차에 떨어지면서 집안형편상 시험 공부를 포기하고 취직을 해야만 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시험을 쳐서 들어갔지만, 행정학을 공부한 나로서는 경제학 석'박사 위주로 된 조직에서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결국 KDI 1년여 동안 사시 공부를 계속해 군법무관 2차시험에 합격하고 법무관이 됐다.
-군법무관으로서 어떤 일을 했나, 기억에 남는 사건은.
▶군 판사, 검찰관, 변호사 임무를 모두 거치면서 많은 경험을 했다. 법무관 초임 시절 소속 부대 검찰관을 하면서 옆 부대 국선변호인 임무를 수행했는데, 옆 부대 병사의 군무이탈 사건을 맡았던 적이 있다. 당시 탈영 병사의 이탈기간, 재복무의사, 이탈 이유 등을 살피면서 변호에 힘을 쏟았다. 결국 이 병사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돼 부모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군 복무 후 좋은 변호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갖는 계기가 됐다. 창군 이래 최대 금융사기사건을 비롯해 장군 진급을 미끼로 수천만원을 가로챈 브로커 사건, 행정데이터베이스 구축과정에서 업체와 군 간부 간 억대 뇌물이 오간 사건 등이 기억에 남는다.
-여성 법무관으로서 힘들었던 점은.
▶법무관 임관 후 사단 법무참모로 가야 하는데, 여자를 참모로 쓴다는 데 거부감이 있어 나가지 못했다. 이듬해 부인이 간호병과 대령이어서 여군에 대한 편견이 없는 36사단장 참모로 갈 수 있었다. 여군 관련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점도 문제다. 특히 자녀를 가진 여군이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도록 부대 내 보육시설 확충이 시급하다.
-어떤 변호사가 되려나.
▶군 관련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가 되겠다. 특히 법무관 시절 육본 인권과장을 하는 등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다. 여군 1만 명 시대가 다가온 만큼 여군 인권문제에 많은 관심을 두겠다. 후배들에게는 꿈을 가지고 살 것을 권유하고 싶다. 구체적인 삶의 목표가 있고,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길이 열린다. 현 세대는 취업도 어렵고 앞이 잘 보이지 않지만, 뚜렷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김병구 기자 kbg@msnet.co.kr
사진 이성근 작가 lily_37@naver.com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