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 모를 흔들 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1988)
1990년대 초반 허수경 시인이 대구에 왔을 때 시인들 사이에 섞여 그녀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젊은 나이지만 '술집 주모' 같은 작은 키의 외모에 멋들어진 노래 한 자락을 뽑는 그 시인에게 사람들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몇 년 후 그가 유럽으로 가서 고고학을 전공한다는 얘기를 책을 통해 전해 들었고, 그 사이 기다리던 시집도 몇 권 나왔다.
책장에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라는 말에 사로잡혀 오랜만에 그의 첫 시집을 꺼내들었다. 우리의 지금 이 슬픔이 언젠가는 거름이 될 거라는 젊은 시절의 희망이 그에게 지금도 유효할까? 지금 우리 곁의 '탈상'을 끝낸 많은 슬픔들이 언젠가는 거름이 되어 좀 더 나은 세상의 생명을 자라게 할 거라는 희망을 우리는 아직도 가져도 되는 것일까?
20년이 더 지난 후 시인은 이제 '목마름이 생애의 열쇠였다'(『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학동네. 2011)고 쓰고 있다. 슬픔과 목마름 사이의 거리… 세월이 지나서야 보이는 걸까. 타인 곁에 서 있지 않은 슬픔, 스스로 썩고 생에 목 말라보지 않은 혼자만의 슬픔은 거름이 될 수 없다는 것. 유행가 가사처럼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그래도 함께하는 슬픔은 거름이 될 것임을 우리는 믿어야 하지 않을까?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슬퍼하고 울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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