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하늘 받칠 기둥을 자르려 하네."(설총 아버지 원효 스님) "10년 동안에 과거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 아니다."(최치원 아버지 최견일) "네 눈은 역적의 눈이야."(최제우 어릴 적 마을 또래들) "어린아이를 때리지 마라. 어린아이를 때리는 것은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라."(최시형)
2천 년 한국 유교사에서 존경받는 인물 18성현(聖賢)은 조선의 국립대학인 성균관에 모셔졌고 유생들은 제사로 업적을 기렸다. 우리 유학자로 그 맨 앞에 신라인 설총(薛聰)과 최치원(崔致遠)이 자리했다. 이들과 달리 조선조 운명이 저물 즈음 조선의 통치철학인 유교의 질서를 어지럽힌 죄목 즉 좌도난정(左道亂政)으로 참수(斬首)와 교수(絞首) 형으로 삶을 마친 인물이 최제우(崔濟愚)와 최시형(崔時亨)이다. 우리나라 유교 초창기의 2인은 성현의 반열에 올랐고, 유교 말기의 2인은 역적으로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쳤다.
유교사에서 대척점에 섰지만 시대를 달리 산 네 위인(偉人)은 공통점이 있다. 어린 시절 겪어야만 했던 아픔과 고통, 고난이다. 그리고 고단한 시기의 슬픔을 딛고 가보지 않은 길을 걸었거나 새 길을 개척했다. 그랬기에 한 시절 극명한 엇갈린 평가와 달리 오늘날 모두 위인으로 존경의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리라.
설총은 파계한 아버지 원효 스님을 두었기에 또래들로부터 아버지를 비하하는 말로 어린 시절 놀림을 받았을 터이다. 최치원은 아버지 엄명으로 12세에 부모 품을 떠나 당(唐)으로 눈물의 유학을 떠났다. 신라 경주에서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3개월을 걷고 배를 타고 2천600㎞의 고학(孤學) 길을 떠나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과부 어머니를 둔 최제우는 서자 취급과 외모로 어릴 적 따돌림당해야 했다. 최시형 역시 5, 12세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로 여동생과 끼니를 걱정하며 자랐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어릴 적 시련을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 극복한 설총과 최치원은 유교 업적과 활동 때문에 성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최제우는 유년기 왕따, 겹친 가난의 시련을 딛고 평등세상을 꿈꾸며 동학(東學)을 창시했다. 최시형은 최제우 뒤를 이어 평등의 씨앗이 싹 트고 꽃 피도록 생애를 바쳤다. 특히 사회 약자인 어린이, 여성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뒷날 방정환이 만든 '어린이날'의 뿌리는 그였던 셈이다. 어제 맞은 풍요의 어린이날에 고달픈 어린 시절을 보낸 네 위인을 생각해 봤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