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의병 기리는 사찰

'짐은 바라노라!' 1905년, 러'일전쟁 승리로 일제는 거침없이 조선 삼키기에 나섰다. 조선의 외교권 박탈에 이완용 같은 오적을 앞세워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었다. 무력한 고종은 자신이 자와 호, 이름까지 내린 동엄 정환직(1843~1907)을 불렀다. 그리고 "경은 화천지수(華泉之水)를 아는가? 짐은 바라노라"며 '짐망'(朕望)이란 두 글자의 밀지를 내렸다.

'화천지수'는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 경공(頃公)과 장군 봉축부(逢丑父)에 얽힌 이야기다. 춘추오패인 제 환공(桓公)의 증손자인 경공은 진(晉) 등 주변 4개 연합국과의 싸움에서 위기에 몰렸다. 봉축부는 경공 갑옷으로 갈아입고 자리를 바꿔 경공에게 수레를 몰게 했다. 진과 협상에 나선 봉축부는 위장부하 경공에게 "목이 마르니 화천의 물을 떠오라"고 했다. 경공은 이를 이용, 도망해 살았다. 고종은 밀지로 동엄에게 조선과 자신을 일제로부터 구해달라는 속 뜻을 전한 셈이다.

곧 관직을 버린 동엄은 아들 단오 정용기(1862~1907)에게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자신은 고종의 군자금과 사재 등으로 무기구입에 나섰다. 1906년 3월, 단오 지휘 아래 24개 고을에 79명의 의병장을 갖춘 산남의진이 결성됐다. '산남'은 영남을 일컬었다. '나라가 왜적에 어려서 수운이 강산에 감돌 때/…/조국을 찾고자 용감히 의기를 들었네'란 산남의진가도 만들었다.

서울 진공을 위해 일본과 싸우던 단오는 1907년 9월 경북 죽장 입암전투에서 전사했다. 아들에 이어 2대 의병장이 된 동엄도 서울 진공에 나서다 그해 11월 6일 붙잡혀 같은 달 16일 총살로 영천서 순국했다. 순국 전날 '몸은 죽을망정 마음마저 변할소냐/…/나머지 뒷일을 누구에게 부탁할까…'라는 절명시만 남긴 채. 1908년 3대 의병장 최세윤을 끝으로 산남의진은 구심점을 잃었지만 의병 연합부대인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의 단초가 됐다.

산남의진을 일으킨 입암의 신라고찰 거동사가 2013년부터 산남의진순국선열추모제를 열고 있다. 기념화 부지도 마련 중이라고 한다. 이곳은 사찰로는 드물게 정부가 정한 현충시설이다. 조선은 불교 배척과 승려 천시 왕조였다. 그러나 임란 때 서산대사는 전국 승병을 총지휘해 왜적과 싸웠다. 사명대사는 임란 뒤 일본과의 담판, 조선포로 송환 등 목숨을 건 사신 역할도 했다. 나라는 홀대했지만 불교의 나라 사랑은 시공을 초월하는 모양이다. 1일 의병의 날에 앞서 열린 사찰 추모제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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