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제 민주주의는 간단히 말해 '국민-주인'이 선출한 '대표-대리인'이 전자를 대신해 국가를 운영하는 체제다. 이런 체제에서 대리인은 주인의 뜻과 희망의 충실한 이행을 약속한다고 전제된다. 실제로 그런 약속을 하지 않으면 대리인은 당선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주인-대리인 관계는 쉽게 깨진다. 주인과 대리인의 이해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일치는 주인에 대한 대리인의 배반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배반의 대상은 전체 국민인 것이 일반적이다. 만만하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에서 전체 국민은 '힘의 집중도'에서 취약하다. 국민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책은 없다. 인적 구성과 이해관계의 다양성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 국민은 특정 정책에 단일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이는 대리인에 대한 압력이나 표(票)의 분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반면 특정 이익집단은 단일한 목소리를 낸다. 그래서 대리인에 대한 압력의 밀집도와 표의 결집도에서 이익집단은 전체 국민보다 압도적 우위에 선다. 이 때문에 이익집단은 소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수다. 대리인이 이익집단에 쉽게 '포획'되는 까닭이다. 이것이 대의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가장 큰 함정이다.
결국 대의 민주주의의 건강성은 대리인이 주인에 대한 배반의 유혹을 억제해 주인의 이익에 얼마나 충실 하느냐에 달렸다. 그런 점에서 여야의 공무원연금 개혁(개혁이 아니기 때문에 형용의 모순이다) '야합'은 민주주의의 타락이다. 여야가 한통속이 돼 공무원이란 특정집단의 이익을 보호한, 전체 국민에 대한 배반이다. 그 이면에는 공무원에게 밉보여 좋을 것이 없다는 얄팍한 계산이 깔려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처음부터 공무원연금 개혁에 뜻이 없었다. 자체 개혁안을 내지 않고 뭉개다 대타협기구 활동 종료 직전에, 그것도 '+α '니 '+β '니 하는 난수표 같은 안을 내놨다. 그리고 '국민소득 대체율 50% 인상'을 들고 나와 '공무원연금이 많은 것이 아니라 국민연금이 적은 것이 문제'라며 물타기를 했다. 새누리당도 다를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여당 시늉을 내는 듯했으나 막판에 슬그머니 새정치연합과 손을 잡았다. 이렇게 여당 같지도 않은 여당, 야당 같지도 않은 야당에 "정권을 잃더라도 필요한 일을 하라"는 슈뢰더 전 독일 총리의 충고는 바보 같은 소리일 뿐이다.
공무원연금 개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공무원의 노후를 위해 국민 전체 그리고 미래세대에게 돈을 내라는 것이다. 향후 70년간 333조원의 재정부담을 줄였다지만 같은 기간 재정이 계속 부담해야 할 돈은 70년간 1천654조원이나 된다. 게다가 이는 향후 70년간 물가상승률, 공무원 수의 증가, 평균 수명 연장에 따른 연금 지급기간 증가 등을 감안하지 않은 수치다. 재정 절감 효과는 333조원보다 적어지고 재정 부담은 1천654조원보다 더 늘어날 것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주인 배반'을 호도하기 위해 여야는 개혁안을 '사회적 합의'라는 말로 포장한다. 기만적인 수사(修辭)다. 이 말이 성립하려면 합의 참여자들이 미국 철학자 존 롤스가 말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써야 한다. 무지의 베일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재능, 지위, 가치관, 재산 등 자기 처지를 모르는 '원초적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쉽게 말해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야가 말하는 사회적 합의는 여기에 접근도 못 했다. 개혁안을 만든 실무기구는 공무원이 주축을 이뤘기 때문이다(9명 중 7명이다). 여기서 나온 '개혁안'이 다수 국민이 아니라 공무원의 이익을 보장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이렇게 해서 공무원연금 개혁은 실종됐고, 머지않은 시점에 다시 손대지 않을 수 없는 과제로 남게 됐다. 과연 그때 가서는 개혁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왠지 그럴 것 같지 않다는 걱정이 든다. 한국 정치집단의 파렴치한 행태로 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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