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태맹의 시와함께] 비

정 지 용(1902~1950)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 섰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며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山새 걸음걸이.

여울 지여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듣는 비ㅅ낯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전문. 『정지용 시전집』. 문화생활사. 1987)

서정시의 전형이다. 가을비 아닐까? 차가운 그늘과 회오리바람, 까칠한 산새 다리와 수척한 물살 그리고 붉은 잎. 그는 다른 산문시 「비」에서 비를 이렇게 분류했다. "뿌리는 비, 날리는 비, 부으 뜬 비, 붓는 비, 쏟는 비, 뛰는 비, 그저 오는 비, 허둥지둥하는 비, 촉촉 젖는 비, 쫑알거리는 비, 지나가는 비, 그러나 십일월 비는 건너가는 비다. 이박자 폴카춤 스텝을 밟으며…." 이를테면 이 시의 붉은 잎을 밟으며 가는 비는 두박자 폴카 리듬을 타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오규원(1941~2007) 시인의 죽기 전 시들이 떠오른다. "산뽕나무 잎 위에 알몸의 햇볕이/ 가득하게 눕네/ 그 몸 너무 환하고 부드러워/ 곁에 있던 새가 비켜 앉네."(전문 「나무와 햇볕」 『두두』 2008) 이 두 시가 가지는 이미지 형성의 유사성과 차이는 무엇일까? 오규원은 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인은 이미지의 의식이다." 적어도 이 시에 한해서는, 정지용 시인에게도 이 말을 수식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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