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여성 화가가 있었다. 그녀의 작품전에서 한 평론가가 "재능도 있고 첫눈에 호감이 가는 작품이지만 깊이가 없군"이라는 감상평을 했다. 그녀는 이 말을 들었을 때 개의치 않았다. 얼마 후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신문에 실린 유사한 평을 접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만이 들어찼다. '나는 깊이가 없다.' 그녀는 붓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상심한 그녀는 깊이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지난달부터 인터넷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 순위를 보노라면 '대기업 공채 시즌이구나' 싶다. 취준생이라면 너나없이 자신의 열정을 증명하란 말을 들었을 테다. 자기소개서에는 열정을 쏟은 경험을 적으라고 한다. 면접에선 '열정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이런 질문과 맞닥뜨린 이들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수능시험만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수능 점수에 맞춰 생각해본 적 없는 전공을 택했다. 대학 4년간 전공의 겉만 핥고는 적성, 어린 시절 꿈과는 상관없이 그저 조금이라도 더 많은 급여를 주는 곳에서 직장생활을 한다. 이렇듯 지루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열정을 요구하는 것은 형용모순이다.
언젠가부터 대학 교양 과목에서 직업 관련 수업이 심심찮게 보인다. 이런 강좌에선 내가 갖고 싶은 직업을 미리 정하길 종용한다. 그리고 이를 이루려면 해야 할 다양한 경험, 필요한 자격증, 공인 영어점수 등을 조사하라는 과제를 낸다. 또 서점에 있는 많은 책이 이 일련의 것들에 일찍부터 '미쳐라'고 주문한다. 정말 미리 한 우물을 정하고 파고들면 성공하고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을 다 이룬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과연 이런 것이 열정에 미친 삶일까?
세상이 말하는 열정은 타자에게 자신을 끼워 맞추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이면은 열정이란 가면 뒤에 숨은 우러름과 밥벌이에 대한 속물적 욕망이다. 열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물리나 화학처럼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열정에는 대외활동, 자격증, 공인 점수 등으로 계량화된 허상의 신뢰성을 만들어 낼 수도 없다. 이보다는 삶을 즐기는 태도가 훨씬 더 열정적이다. 내가 갖춘 능력과 재능에 만족하면서 주어진 만큼 누리고 최선을 다해 살면 된다. 열정이란 '불가능한 꿈을 이루는 것'보다 자족함에 더 가까이 있다.
대개 인간은 느긋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만 열정적인, 약간은 게으른 성향을 갖고 있다. 우리 사회 풍조는 이런 사람을 루저 취급한다. 그래서 열정적인 양 하루하루 연기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개인의 특수성을 용납하지 않는 탓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깊이에의 강요'를 말했듯 오늘날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생활인은 '열정에의 강요'를 당한다. 이 생활인들은 쥐스킨트 책 속 '그녀'처럼 속물적 허상을 좇고 있을 뿐이다. 허상이 그녀를 사로잡아 삶을 파괴했듯 우리를 파괴하기 전에 자족하는 삶에 '미쳐' 보는 것은 어떨까?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
검찰, '尹 부부 사저' 아크로비스타 압수수색…'건진법사' 의혹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