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와 가나코/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예담 펴냄.
남편의 폭력이 시작된 것은 결혼하고 석 달이 지날 때부터 였다. 술 취해 들어온 남편은 성관계 요구를 거부하자,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이튿날 남편은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다며 싹싹 빌며 사과했다. "어젯밤에는 내가 어떻게 된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보름도 지나지 않아 남편의 두 번째 폭력이 이어졌다. 이제 아주 사소한 일에도 남편은 버럭 화를 내거나 때렸다. 발광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 같았다. 가나코는 숨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가나코의 친구 나오미는 어릴 때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맞는 걸 보며 자랐다. 어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2층으로 도망치거나 귀를 막는 것뿐이었다. 엄마는 겁에 질린 작은 짐승처럼 몸을 웅크리고 맞을 뿐이었다. 저항하거나 소리치지 못했고 도망치지도 못했다.
남편한테 맞고 사는 친구 가나코 역시 어릴 때 자신이 본 엄마의 모습과 꼭 같았다. 도망칠 수도 없고, 부모님께 알릴 수도 없다고 했다. 이혼을 요구해도 들어줄리 없다고 했다. 경찰에 신고하면 잡혀가겠지만 금방 풀려나서는 자신과 가족에게 더 흉악한 폭력을 저지를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두들겨 팬 다음에도 병원에 가지도 못하게 하고, 대신 약을 사주는 사람이었다.
"가나코가 바라는 것은 뭐야?"
"평범하게 살고 싶어. 밤이면 꼬박꼬박 잠을 자고 맛있는 물만 먹을 수 있으면 돼." 가나코는 마시는 물조차 쓰다고 했다. 나오미는 그런 친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외면하고 도망치면 평생 자책감에 사로잡힐 것 같았다.
"죽여 버리자."
그냥 뱉어본 말이었다. 그날 이후 가나코의 남편 다쓰로를 '제거' 해버리는 공상을 했다. 마치 무슨 물건을 만들 듯이, 어떤 꿈을 하나씩 이루어가듯이 이리저리 궁리를 했다. 그러나 상상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쓰로의 남편과 똑같이 생긴 중국인 불법 입국자를 알게 되었다. 키도 체격도, 등이 약간 굽은 것까지 닮았다. 가나코의 몹쓸 남편과 중국인 불법 입국자를 연결하자 하나의 완전한 퍼즐이 완성됐다.
"우리가 네 남편을 죽여 버리고, 네 남편과 꼭 닮은 중국인 불법 입국자가 네 남편의 여권을 들고 중국으로 출국해버리는 거지. 그 과정은 출입국 기록에 고스란히 남을 것이고, 네 남편은 현재 일본을 떠나 중국에 있는 거지. 그냥 단순 가출 혹은 실종으로 사건은 마무리 되는 거야."
그렇게 두 사람은 가나코의 남편 다쓰로 '클리어런스 플랜'(남편 제거 계획)을 세웠다. 처음에는 겁에 질려 떨던 가나코도 점점 용기를 얻고, 현재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살기 위해서는 죽여야 한다.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장편소설 '나오미와 가나코'는 총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나오미의 관점에서 '대학 친구 가나코가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부터 남편을 죽이고 암매장하는 과정'까지다. 살인은 치밀하게 계획되고 단호하게 실천된다.
2부는 가나코의 관점에서 '남편을 죽인 다음날부터, 완전범죄라고 생각했던 남편제거작전의 전모가 드러나는 과정'까지를 다루고 있다. 완벽했던 것들이 얼마나 많은 허점을 남기게 되었는지, 두 사람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다른 직종에 있는 사람들은 의심을 가질만한 일들을 수없이 저질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남편의 여동생 요코와 흥신소 직원이 나타나 서스펜스를 더한다.
500쪽에 달하는 긴 분량이지만 소설은 빨리 읽힌다. 서스펜스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문학적 향기는 없다. 말하자면 드라마가 아주 뛰어난 작품인 셈이다.
두 여자가 남자를 살해하고 도망친다는 점에서 영화 '델마와 루이스'와 닮았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는 끝내 해방된 세계를 향해 장렬하게 자살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다르다. 남편의 폭력에 웅크리고 앉아 맞을 뿐이던 가나코는 살해 증거가 거의 다 드러난 뒤, 남편의 동생 요코의 자살 요구에도, 경찰의 자백요구에도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물러서지 않고 대치하는 것, 그것은 정죄(淨罪) 의식 같은 거였다. 웅크리고 맞기만 했던 여성이 맞서서 싸우는 것이다. 명백한 살해증거가 드러나자 가나코의 머릿속에서는 '게임오버'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가나코에게 그것은 '이젠 끝장이다'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더 이상 거짓 시나리오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에서 게임오버일 뿐이었다.
인터넷 서평에서 한 독자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도저히 그녀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차마 못 보겠다. 그리고 책을 덮어버렸다. 한참 뒤에 심호흡을 하고 다시 책장을 펼쳤다"라고 썼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독자는 "이혼이 어려운 우리 사회의 구조, 한쪽의 요구에도 이혼해주지 않으려는 남편 혹은 아내가 상대방을 살인자로 만들고 자신을 죽음으로 이끈다"고 말한다. 492쪽, 1만3천500원.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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