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석하의 영국 여행 길라잡이] 소설 '폭풍의 언덕' 무대 하워스

'진짜 아름다운 외딴 시골'…그 구절 찾아온 순례객 연 7만 명

브론테 가족이 살던 목사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브론테 가족이 살던 목사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네 펍'연기에 그을린 벽…

#200년 흘렀지만 그 모습대로

#벽지마을이 세기 명작 산실로

에밀리 브론테(1818~1848년)의 소설 '폭풍의 언덕'의 무대가 바로 에밀리가 자라고 죽은 하워스(Haworth)임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한 번이라도 하워스에 가 본 사람은 의심을 품을 이유가 전혀 없다. 지금도 인구가 6천400명밖에 안 되는 하워스는 고속도로에서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한 시간은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잉글랜드 중부 요크셔 지방의 산골하고도 첩첩 산골 마을이다. 소설도 그런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여긴 진짜 아름다운 시골이다'라고 시작하는 소설 둘째 구절 바로 다음 줄부터 드러내 놓고 하워스가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음을 말한다. "잉글랜드 전체 어디에서고 이렇게 세속의 소란으로부터 완벽하게 동떨어져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염세가에게는 천국 같은 완벽한 곳이다." 정말 영어의 통상적인 표현 그대로 '외딴 곳'(middle of nowhere)인 산골이다.

요크셔 황무지 언덕 위에 얹힌 하워스는 바람이 불지 않을 때도 이름 그대로 바람이 불어 오는 듯 휑하고 쓸쓸하다. 여러 번 가봐도 기분이 달라지지 않았다. 워낙 소설이 주던 격한 인간 감정들의 표현 때문인지 언제나 무거운 마음이었다. 사랑과 배반과 실연과 증오와 연민과 동정과 질투와 복수와 회한! 인간 사이에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이 소설 한 편에 다 들어 있다. 과연 남녀 간의 진한 애증의 갈등에 관한 한 '폭풍의 언덕'을 따라갈 소설이 과연 더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소설의 배경으로 하워스는 정말 완벽하다.

이런 볼 것 하나 없는 황무지 산골 마을을 1년에 7만여 명이 방문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브론테 자매들이라고 불리는 샬롯, 에밀리, 앤 브론테 때문이다. 세 자매가 쓴 소설 '제인 에어(샬롯), 폭풍의 언덕(에밀리), 와일드 펠의 세입자(앤)'가 불러들이는 순례자들에게 이곳은 성지다. 계곡을 두고 양쪽의 언덕에 하워스 마을이 있다. 브론테 아버지가 신부로 있던 성공회 성당 사제관이 꼭대기에 있는 쪽은 인가가 30가구도 안 된다. 그나마 자매들이 살았을 때로부터 200년이 흐른 지금도 마을은 그때에 비해 별로 변한 것 같지 않다. 심지어는 브론테 가문의 유일한 아들이자, 세 자매가 한 화면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초상화(영국 국립초상화 박물관 소장)를 그렸던 패트릭이 알코올 중독이 되도록 술을 퍼마시던 동네 펍 '블랙 불'도 아직 그대로 있다. 지난 세월만큼 잘 닳은 반질반질한 자갈이 깔려 있는 좁은 골목길 양옆 집들의 벽도 연기에 그을린 채로 남아 있다. 좁은 길을 걸어다니다 보면 나지막한 지붕 밑 조그만 나무문에서 브론테 가족의 일들을 증언해줄 그때의 사람들이 곧 나올 것만 같다.

사제관과 성당 사이에는 하워스 주민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매일 아침 자매들이 일어나 창문을 열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이 공동묘지였을 것이다. 일찍이 어머니를 잃고 시집 안 가고 자신들을 돌본 이모 손에서 자란 세 자매는 비록 이 묘지가 아니더라도 이미 생의 험한 굴곡을 몸소 체험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6명의 친형제 자매 중에서 성인으로 자란 4명은 그래서인지 유난히도 사이가 각별했다. 자신은 케임브리지대학교 출신이면서도 아일랜드인이어서인지 벽지 조그만 성당에 귀양 오듯이 발령받아 와서 평생을 봉직한 아버지 때문에 자녀들도 결국 이 산골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물론 모두 40세도 못 넘기고 요절했다. 제일 큰언니 샬롯만 38세까지 살았지 나머지는 전부 30세 전후를 제대로 못 넘겼다. 이렇게 짧은 삶 속에서도 이들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어떻게 이런 산골에서 지식을 얻어 그런 대단한 작품들을 쓸 수 있었는지 정말 놀랍다. 이들의 소설은 당시 세상 문물과 왕성하게 교류를 하지 않고 고립된 채 쓰여서인지 정말 독특하다. 지금 읽어도 200년이란 오랜 세월 전 인간의 감정과 지금이 이리도 차이가 없는지 놀랍다.

브론테 사제관 박물관은 바로 이들이 살던 집이다. 특히 세 자매가 가지고 놀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야기도 쓰고 그림도 깨알같이 그려 놓은 노트부터 세 자매의 손때가 묻은 장난감, 직접 손으로 뜬 레이스들을 비롯해 별별 것들이 다 모여 있다. 아버지 패트릭이 부인, 처제, 자녀 넷을 모두 앞세우고 84세에 죽은 뒤, 영국에서 작가기념협회로는 가장 먼저 설립된 브론테 기념협회가 주위 사람들의 손에 의해 각지로 팔려나갈 물건들을 각고의 노력으로 보존해 지금의 알찬 기념관을 유지하고 있다.

런던에서 정말 아침 일찍 서두르면 자동차로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이다. 기차로도 조금 여러 번 갈아타긴 하지만 당일 다녀올 수는 있다. 그러나 언덕 위를 걸어가서 폭풍의 언덕 길, 폭풍의 언덕 폭포, 그리고 언쇼 가족의 집 폐허를 다녀올 수 있는 4㎞를 둘러볼 시간까지는 있을지 모르겠다.

재영 칼럼니스트·여행 작가 johankw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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