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은 아무리 증거를 들이대도 자신이 한 나쁜 짓에 대해 솔직하게 '잘못했다' '미안하다'라고 좀처럼 말하지 않는다. 높고 책임질 만한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심하다. 총리나 장관 등의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가장 흔히 듣는 변명 가운데 하나가 '기억이 안 난다' '심려를 끼쳐 드렸다면 미안하다'는 말이다.
기억이 안 난다는데야 어쩔 수 없지만, 후자에는 뉘앙스가 깔린다. 별것도 아니고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혹시 마음이 '상했다면' 미안하다는 뜻이다. 해야 할 말은 '잘못했다'인데 마음이 상했을 수도 있겠다며 그 '상황'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장난을 하는 것이다.
소설가 신경숙 씨가 표절 논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신 씨는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의 문장과 '전설'의 문장을 여러 차례 대조해 본 결과, 표절이란 문제 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아무리 지난 기억을 뒤져봐도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한 대체적인 분위기는 '신 씨가 표절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표절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에다 자신의 기억을 못 믿겠다고 덧붙임으로써 '기억에도 없고 표절도 안 했지만,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은 미안하다'라는 말장난이 됐다.
'잘못했다'고 하면 될 것을 어떻게든 직접적인 표현은 피하려는 신 씨의 처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번 사태에 대한 문단 일부의 반응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시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은 "한국 문단이 성숙한 논의를 통해 해결해야 할 사항"이라고 했다. 표절 의혹을 제기한 소설가 이응준 씨는 "문학의 일은 문학의 일로 다뤄져야 한다. 표절에 대한 검찰 조사는 반드시, 즉각 철회돼야 한다. 미개사회가 될 수는 없다"고 했다.
성숙한 논의나 문학의 일로 다룬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또한, 검찰이 표절 문제를 수사하는 우리나라가 미개사회라는 것인지, 고발하는 풍토가 미개사회라는 것인지도 애매하다.
그러나 문장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표현해야 할 문인들이 애매한 낱말을 이리저리 꿰맞춰 흐리멍덩하게 하는 것은 초점 흐리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 문제는 신 씨 개인을 넘어 문단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개하다'는 말은 수없는 표절 논란에도 자성은커녕 두둔하거나 두루뭉술하게 넘기려는 우리 문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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