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틈으로 앵초꽃 몇 송이
조심조심 얼굴을 내민다
그 옆에는 반란이라도 하듯
빨간 튤립들이 일제히 꽃잎을 터뜨린다
가까이 다가서듯 솟아 있는
성당 종탑에는
발을 오그린 햇살들이 뛰어내린다
한 중년 남자가 저만큼 간다
헐렁한 모자에 얼굴 깊숙이 파묻은 채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걸어간다
나는 잃어버린 말, 새 말 들을 더듬으며
유리창 너머 풍경들을 끌어당긴다
침묵은 이내 제 길로 되돌아가고
봄 아침은 또 어김없이
그 닫힌 문 앞에서 말을 잃게 한다
빗장은 요지부동, 안으로 굳게 걸려
문을 두드릴수록 목이 마르다
새 말, 잃어버린 말 들은 여전히
침묵의 벽 속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전문. 『침묵의 결』. 문학과 지성사. 2014)
"언어 속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 말한 것처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침묵의 벽'은 시인이 서 있는 경계이고 전선(戰線)이다. 침묵의 틈에서 배어 나온 '그 무엇'은 앵초꽃과 빨간 튤립, 발을 오그린 햇살 등으로 기호화되지만 그것은 '그 무엇'에 대한 표현이 아니다. 물론 시인은 이쪽과 저 너머가 소통될 수 없다는 불가지론자나 이원론자가 아니어서 꽃들과 햇살(이라는 언어)을 통해 그 삶의 비밀이 드러나기를 원한다. 시인에겐 이중의 노동이 필요하다. 침묵의 벽에 들러붙어 배어 나오는 그 무언가에 잠기기, 그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기.(이것은 시공간적 선후나 배치가 아니다.)
(「서녘 하늘」 부분) 그런데,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신비, 이 삶 너머의 그 어떤 것? "세계의 한계에 대한 느낌, 이것이야말로 신비한 것이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했을 때 이 신비는 이 삶 너머를 이야기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침묵의 소리는, 이 치열한 삶의 시장 속으로 되돌아가 그곳에 서 있을 때 더 잘 들리는 것은 아닐까?
시인





























댓글 많은 뉴스
'최고가격제'에도 "정신 못차렸네"…가격올린 주유소 200여곳
대구 취수원 이전 '실증 단계' 돌입…강변여과수·복류수 검증 본격화
경북 서남부권 소아·응급·분만 의료 인프라 확충
1시간에 400명 몰렸다… 고물가 시대 대학가 '천원의 아침밥' 인기
대구시, 11월까지 성매매 우려업종 점검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