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봉사는 내 운명" 전석복지재단 여운재 前 이사장

"내 것 떼어 나눴는데 어느 순간 모두 다시 돌아오고 있었어요"

"제가 가진 것 조금을 나눴을 뿐인데 보람과 행복이 몇 곱절로 제 곳간을 채우고 있어요." 여운재 전 전석복지재단 이사장이 소망의원 진료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최근 롯데가(家) '형제의 난'은 재화가 주인을 잘못 만나면 어떻게 가문을 망신시키고 사회적 조롱거리가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사자, 가족들이 모두 나서 한일 양국을 오가며 '재산놀음'에 분주할 때 그날 외신 한쪽에서 빌 게이츠, 워런 버핏의 기부 기사들이 지면을 장식했다. 이 미담들이 나오면서 롯데가 사람들이 더 비참해졌음은 물론이다.

이들을 더 '구차'하게 만드는 사례는 대구에도 있다. 바로 전(前) 전석복지재단 여운재(67) 이사장이다. 지역 사회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전석복지재단은 여 원장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재단이다. 여 원장은 직원, 봉사자 등 5, 6명에 불과하던 재단을 10여 년 만에 19개 기관 190명의 '복지 일가'로 성장시켰다.

그 사이 재단의 자산 가치도 몇 배로 성장했다. 손톱만큼도 이재(理財)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훌쩍 커버린 재단의 외형에 邪心(私心)이 들 만도 할 것이다. 2010년 여 원장은 돌연 이사장직 사퇴를 선언하고 재단을 가족이 아닌 직원에게 물려주었다. 전 재산을 재단에 기부한 것이다. 국내에선 이런 사례가 거의 없어 전국 복지재단에서 이 결정을 크게 주목했다고 한다. 이 선언이 나온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그 사이 재단은 잘 돌아가고 있었고 전 재산 사회 환원이라는 원칙도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있었다. 재단부설 병원(소망의원)에서 이젠 월급쟁이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여운재 원장을 만나보았다.

◆전 재산 털어 복지재단…가족들은 생활고

1970, 80년대 여 원장은 잘나가던 의료인이었다. 내과 진료에서는 전국적 명의 반열에 올랐고 유수 병원에서 몇 번씩이나 병원장 초청을 받았다. 원하는 만큼 돈도 벌었고 크지는 않지만 자기 건물도 한 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건물을 운영하면서 여 원장은 봉사단체 대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아! 이게 이타(利他)적 삶이구나.' 여 원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학생들을 도와줄 일을 찾다가 먼저 후원을 했다. 봉투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아예 건물 한 층을 내놓고 봉사자들 월급을 대기 시작했다.

여 원장이 본격적으로 후원을 시작하면서 복지단체의 살림이 부쩍 커졌다. 특히 현 재단 이사장 정연욱(51) 씨가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복지단체의 틀을 갖춰 갔다. 벌여 놓은 살림에 직원은 부쩍 늘어나고 문제는 재정이었다. 1993년 여 원장은 드디어 전석복지재단을 설립하면서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빌딩을 재단에 귀속시켜 버렸다. 한발 더 나가 자신이 운영하던 병원까지 재단의 부속기관으로 편입해 버렸다. 병원 수익은 모두 재단으로 가고 자신은 월급쟁이 의사가 된 것이다.

재단이 자리를 잡으면서 외형도 커졌지만 비례해서 여 원장의 가정 살림은 쪼그라들었다. "복지도 여윳돈이 있어야 한다는 걸 처음 깨달았어요. 초창기 몇 년은 월급을 제대로 가져갈 수가 없었어요. 식구들이 무척 생활고에 시달렸죠." 남 좋게 하자고 제 식구를 배 곯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족 누구도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19개 복지단체'기관으로 성장

재단의 이름인 전석(轉石)은 직역하면 '구르는 돌'이라는 뜻이다. 록그룹 '롤링 스톤즈'와 '구르는 돌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서양 경구가 먼저 떠오른다. 모든 사물은 돌고 순환한다. 재화도 사랑도 봉사도 마찬가지다. 재단에서는 그동안 지역 사회에 많은 봉사와 사랑의 돌을 굴렸다. 이렇게 구르던 돌은 어느샌가 세상 곳곳의 주춧돌이 되어 지역에 복지시설을 일구었다. 재단엔 현재 대구볼런티어센터와 대구시종합복지센터, 장애인복지센터, 성서종합복지관 등 모두 19개의 복지단체가 운영되고 있다.

재단의 사업은 청소년, 노인, 다문화가족들을 망라하고 있지만 재단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분야는 장애인 관련 사업이다. "장애인들이야말로 우리가 먼저 다가가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재가 장애인교육(사랑의 토요학교)을 시작했어요. 그 후 발달'정서 장애인들의 치료시설(아동치료교육센터), 장애인,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진 합창단(사랑의 메아리합창단)을 연달아 열었어요."

재단에서 벌인 여러 사업 중 가장 주목을 받은 사업은 '휠체어실업농구팀' 창단과 '국제휠체어테니스대회'였다. 장애인 스포츠가 재활, 복지 차원을 넘어 국제경기로 영역을 넓혀간 아주 드문 사례이기 때문이다.

여 원장의 기억에 남는 행사는 1997년 대구 오픈 국제휠체어테니스대회이다.

"창립행사를 하는데 관중 동원(보통 장애인 행사의 관중은 가족'지인들이 전부)과 의전이 문제였어요. 부랴부랴 발로 뛰고 초청장을 보낸 결과 대이변이 벌어졌어요. 당시 강창희 과학기술처 장관과 문희갑 시장이 참석 의사를 전해왔어요. 교육청에서 자원봉사 학생들을 보내왔고 2군사령부에서 군악대 퍼레이드까지 벌여줬어요. 급기야 8천 석 관중석이 만석(滿席)이 되었죠. 일개 장애인 행사에 장관, 시장이 참석을 하고 관중석을 꽉 채운 것은 한국 장애인 체육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대통령상'국민훈장 목련장 수상

'배부른 자의 관용'으로 시작했던 여 원장의 봉사는 이제 '낮은 자들의 동반자'로서 결실을 맺고 있다. "되돌아보면 내 것을 떼어서 나누는 과정이었는데 어느 순간 모두 내게로 다시 들어오고 있었어요. 그동안 분에 넘치는 상과 훈장을 너무 많이 받았어요."여 원장은 그동안 자랑스런 대구시민상(1998년), 아산복지재단 아산상(2004년), 자원봉사 대통령상(2004년), 국민훈장 목련장(2009년)을 수상했다.

이런 화려함을 살짝 비켜서 최근 여 원장의 앞날에 짙은 우울이 드리워졌다. 병마들이 동시에 찾아온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앓아온 척추협착증이 도져 보행이 매우 힘들고 지병이 악화돼 이젠 청진기를 드는 게 불편한 상황이다. 이런 소식이 조금씩 알려지자 여 원장을 아끼는 사람들의 병원행이 부쩍 늘었다. 몸에 좋다는 보신 약을 챙겨오기도 한다. "우리 병원 우습죠? 환자들이 의사 병 걱정을 하고, 주치의 안부를 물어요. 의사가 자기 병도 못 고치느냐고 울먹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허 참! 이상한 병원 아닙니까?" 여 원장의 넋두리에 이젠 지역 사회가 답해야 할 때다. 방법은 간단하다. 모두 각자 있는 자리에서 '구르는 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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