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金泉의 門中 이야기] <14> 화순 최씨

도덕 사상 지켜 나간 후손들

동대(東臺) 최선문(崔善門)을 기리는 재실 경원재, 최선문의 집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동대(東臺) 최선문(崔善門)을 기리는 재실 경원재, 최선문의 집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최원지(崔元之)의 아들이 최자해, 최자하, 최자강 3형제다. 화순 최씨 문중은 이후에도 시정공파(寺正公派), 유수공파(留守公派), 도사공파(都事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첨사공파(僉使公派), 지평공파(持平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등 세 파로 분파(分派)된다.

특히 부정공 최자하의 후손 중에서만 12개의 지파가 분파될 정도로 크게 성세를 떨친다. 김천 입향조 최원지를 시작으로 유교(儒敎)의 도덕 사상에서 기본이 되는 3가지의 강령(綱領) 삼강(三綱)을 지켜나가며 전국으로 분파해간 화순 최씨 후손들을 살펴보자.

◆군위신강(君爲臣綱) 충(忠)

만고의 충신 조선 전기의 문신 동대(東臺) 최선문(崔善門'?∼1455)은 최원지의 손자로 아버지 최자강과 어머니 진주 강씨(晋州 姜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최원지는 일찍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김산(金山'김천의 옛 이름) 하로리(賀老里)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그의 문과 급제 여부와 시기에 대해서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문과 장원으로 급제했다고 기록돼 있으나, '국조방목'(國朝榜目)의 문과 급제자 명단에는 없다.

1421년(세종 3년) 처음으로 지평(持平)에 등용된 뒤 문종 때 이조판서를 제수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가 뒤에 공조판서를 지냈다. 최선문은 문종의 뒤를 이은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키기 위해 사직했다. 1455년(세조 1년) 좌찬성(左贊成)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런 최선문의 지조와 고결한 행동을 두고 점필재(人占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지조(志操)는 송죽(松竹)과 같고 정신(精神)은 수월(水月)과 같다"고 칭송했다.

최선문의 신도비(神道碑'임금이나 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 무덤이 있는 길가에 세우는 비석)와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최선문의 신도비문은 김종직이 지었는데 후일 김종직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돼 부관참시(剖棺斬屍)됐다는 소문을 듣고 후손들이 화를 면하기 위해 최선문 신도비를 떼어내 땅속에 묻어 숨겼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후손들이 많이 죽고 흩어져 신도비를 묻은 자리를 알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최선문의 묘가 있는 김천 구성면 양각리 묵방골에는 신도비가 있던 바위만 남아 있다. 후일 후손들은 이 바위 옆에 신도비를 다시 세웠다. 최선문은 김산의 경렴서원(景濂書院)에 배향됐으며, 시호는 문혜(文惠)라 불린다.

◆면면히 이어온 충성심

화순 최씨 문중의 나라에 대한 충성은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시절,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한 최학길(崔學吉'1867~1936)에게로 면면히 이어졌다. 최학길은 한학자였던 남애(南厓) 최창락(崔昌洛'1832~1886)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세에 아버지 최창락을 따라 성재(性齋) 허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후 집안의 형인 양오(陽梧) 최봉길(崔鳳吉'1853~1907)과 함께 사미헌(四未軒) 장복추, 만구(晩求) 이종기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들 문하에서 최학길은 이승희, 장석영, 송준필, 이기형, 장상학 등 당대 성주'칠곡의 유림과 교유했다.

1904년 대한제국 궁내부의 통신사 전화과(電話課) 주사에 임명된 최학길은 매관매직과 탐관오리를 척결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1908년에는 영남에서 계몽사상을 보급하고 신교육을 진흥할 목적으로 조직된 교남교육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러다가 1910년 8월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일본인을 위해 일하지 않겠다며 귀향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전개되는 가운데 영남의 곽종석'김창숙 등과 호서의 김복한 계열 인물들이 중심이 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내고자 하는 파리장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최학길은 김천의 이경균, 이명균, 이석균 등과 동참해 서명했다가 1919년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돼 큰 고초를 당했다.

이후 그는 '기은'(箕隱), '만수문'(萬壽門)이란 두 편액을 걸고 은둔 생활을 했는데, 1934년 조선총독부가 의례 준칙을 통해 전통적 생활 관습을 통제하려 하자 "춘추대의를 품은 자가 인륜이 끊어져 금수가 되는 지경을 당해도 화가 두려워 말 한마디 못하는 게 옳단 말인가"라는 반대 글을 조선총독부에 보내기도 했다.

최학길에게는 사후인 1995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2008년 10월 30일 김천향토사연구회가 주도해 김천 조마면 신안4리 남애정에 '구재 최학길 선생 추모비'를 건립했다.

저서로 1935년 조선의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쓴 '속수금릉지'(續修金陵誌)가 있다. 아버지 대부터 작성해 온 '명산산세고'(鳴山世稿), '경전연의'(經傳演義), '사의부주'(士儀附註) 등을 완성했다. 사후인 1939년 후손들에 의해 '구재선생문집'(懼齋先生文集)이 간행됐다.

◆부위부강(夫爲婦綱) 열(烈)

최선문이 단종임금과의 절의를 지켜 충(忠)을 실천했다면 그의 어머니 진주 강씨는 남편 최자강을 좇아 열(烈)을 몸소 보였다.

진주 강씨는 남편 최자강이 중부령(中部令)으로 있던 37세에 전남 광양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남편의 뜻을 좇는 것은 자식을 훌륭히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해서는 안 된다" "남자는 의리를 빼면 허수아비와 같다"라며 아들 최선문을 엄하고 바르게 가르쳤다.

진주 강씨는 남편이 13년간의 유배를 끝내고 고향인 김산의 하로 마을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하게 준비를 하던 중, 병고에 시달리던 남편이 남원에 이르러 병사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남편에게로 달려간 강 씨는 남편을 껴안고 "이제라도 남편을 따르지 않으면 어찌 아내라 하랴"며 통곡했다. 그가 7일간에 걸쳐 아무것도 먹지 않고 통곡을 하는 동안 남편의 살은 썩어 문드러졌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그녀도 결국 뼈만 남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진주 강씨의 엄한 훈도와 죽음은 아들 최선문에게 영향을 미쳐, 그 아들도 절의를 지켜 청사에 길이 남는 충신이 되었고, 다섯 손자 또한 모두 문과'무과에 급제해 나라의 충신이 되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그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정려를 내렸다. 정려비는 현재 전남 구례군 산동면 계천리에 있다. 또한 사적이 '속삼강열녀전'(續三綱烈女傳)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록돼 있다.

◆전통으로 내려온 열부(烈婦)

입향조 최원지의 24세손 최기수(崔麒洙)의 부인 광주 이씨(光州 李氏)도 열부(烈婦)의 표상으로 불린다. 광주 이씨는 남편 최기수가 중병에 걸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한결같이 병시중을 들었다.

난치병으로 오랜 병고를 치르던 최기수는 결국 사경에 이르렀다. 병시중을 하던 광주 이씨는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겠다는 각오로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남편에게 삶아 먹였다. 남편에 대한 이씨의 정성이 하늘에 닿아 최기수는 오랜 병고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주 이씨의 이런 행동은 곧 관에 알려졌고 열부의 표창이 내려졌다고 전한다.

연안 이씨 이정복(李廷馥'1575~1637)에게 시집간 최률(최원지의 8세손)의 딸 화순 최씨도 김천을 대표하는 열부 중의 한 명으로 전해진다.

구성면 상원마을 이정복에게 출가한 화순 최씨는 신행(新行) 출발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죽어도 시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겠다며 여종 석이를 데리고 시가로 향했다. 그러던 중 왜군과 맞닥뜨리자 연못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화순 최씨에게는 1632년(인조 10년) 정려가 내려졌는데, 당시 인조 임금은 직접 쓴 정려문을 하사했다.

◆부위자강(父爲子綱) 효(孝)

김천 화순 최씨 문중에는 효를 실천한 이들이 많다.

최원지의 9세손 최형은 정묘호란 때 공을 세워 당시 정삼품에 달하는 안주목사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팔순 노모가 생존해 있었다. 고민 끝에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온 최형은 노모를 모시는 데만 정성을 쏟았다. 이런 최형의 효행은 인근 유림에 알려져 크게 칭송을 받았다.

최원지의 14세손 최하대(崔河大)는 기은처사(箕隱處士)로 불렸다. 최하대는 효행이 지극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시묘한 후에도 묘 아래에 집을 짓고 살았다.

최하대의 효행과 관련해서는 도적이 감복해 오히려 치사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화순 최씨 집성촌인 안서동(安棲洞'현 조마면 신안4리)은 화순 최씨 부정공파(副正公派)의 집성촌이다. 마을 앞으로 감천이 흐르고 농사가 잘되는 넓은 옥토를 가진 안서동은 도적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안서동을 침범할 마음을 먹고 일당과 함께 산을 넘던 도적들은 산 중턱에 초막을 짖고 시묘살이를 하는 최하대를 발견했다. 길목에 초막을 지은 최하대를 발견한 도적들은 이곳을 조용히 지나가기 위해 최하대가 자리를 비우길 기다렸다. 하지만 최하대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것처럼 시묘에 정성을 다하며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최하대가 자리를 비우길 기다리며 그를 관찰하던 도적들은 이런 최하대의 효행에 차츰 자신들의 부모를 생각하며 감복했다. 최하대에게 감복한 그들은 안서동을 침범할 생각을 접고 돌아갔다고 전한다. 김천 신현일 기자 hyunil@msnet.co.kr

김천시사

디지털김천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품천사집(品川史集)

금릉지(金陵誌)(금릉지편찬회, 1963)

화순 최씨 대동세보

최동현 화순 최씨 김천화수회 고문

최원덕 화순 최씨 김천화수회 회장

최원봉 화순 최씨 김천화수회 부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알립니다]

화순 최씨 문중은 지난 8월 18일에 연재된 김천의 문중이야기 14편 머릿글 '화순 최씨(和順崔氏)는… 감찰공 최덕윤, 밀양공 최자해, 부정공 최자하, 문정공 최자강, 대사성 최자빈 등 …' 중 대사성 최자빈은 1984년 발행된 '화순 최씨 대동세보'(갑자보)에는 등재돼 있으나 2013년 발행된 '화순 최씨 대동세보'(계사보)에는 실려 있지 않다고 알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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