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유감(遺憾)

지난주 실시간 검색어에 가장 많이 오르고 가장 화제가 되었던 말은 '유감'(遺憾)이라는 말이었다. 사전을 찾아보면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과연 사과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이에 대해서는 전에 이 칼럼의 '빚쟁이' 편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빚쟁이처럼 이 말도 '섭섭하고 불만스러운 느낌'이 확장되어서 '섭섭하고 불만스럽게 해 준 것에 대한 느낌'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 말은 일상적으로는 잘 쓰지 않는 문어(文語)적 표현이기 때문에 약간 불명확한 면이 있어서 정치나 외교에서 잘 쓴다. 정치나 외교에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나 '불쾌하게 생각한다.', '강력하게 항의한다.'와 같은 직설적인 표현은 굴욕적인 느낌이나 또 다른 자존심의 충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남북 고위급 접촉은 서로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가지고 시작을 했었다. 북한은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된 목함지뢰 폭발이 자기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대내외에 선전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목함지뢰 도발에 대해 사과하라는 남한의 요구에 '죄송하다.'고 하는 것은 정권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이다. 남한의 경우 북한이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도 하지 않는데, 대북 확성기 방송을 그만두는 것 역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남북합의서의 문장들을 보면 첨예한 문제는 그냥 슬쩍 피해가는 묘수를 보여준다.

남북합의서 2항을 보면 '북측은 최근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남측 지역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한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주체가 명시된 사과를 원했고 이 문장에는 주체가 명시되어 있지만, 주체의 유감 표명은 '자기들이 한 목함지뢰 도발'이 아니라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이다. 문장을 잘 읽어 보면 목함지뢰 사건은 남측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것은 자신들의 행위와는 상관없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대한민국은 동일본 지진으로 많은 사상자가 난 것에 위로의 뜻을 표합니다.'처럼 느껴진다. 단지 '위로, 애도'와 같은 말 대신 '유감'을 사용했다는 것은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자기들의 지뢰 관리가 잘못되어 남쪽으로 갔고, 그것이 사고를 일으킨 도의적인 책임은 있다는 정도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이 사과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나 북한이 자신들의 결백을 인정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모두 성립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3항을 보면 '남측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모든 확성기 방송을 8월 25일 12시부터 중단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이라는 단서다. 만약 이 문구가 '남측은'의 앞에 들어간다면 이 합의문의 전체 주어가 '남과 북 양측'이 되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사태에 대한 판단은 양측이 일치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문구가 '남측은' 다음에 들어가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사태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남한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맥상 이번 목함지뢰 도발도 비정상적인 사태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이 문구를 재해석하면 '북측이 이번과 같은 비정상적인 행위(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를 한다면 언제든지 대북 확성기 방송을 계속한다.'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2항을 보고 진정한 사과가 아니므로 우리가 손해 본 것이 아니냐고도 하지만 3항은 우리가 얻을 것은 다 얻어낸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신문의 사설이나 칼럼들을 보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논지의 글도 꽤 많았다. 그렇지만 남북한이 전쟁을 하는 것은 전장이 한반도라는 점에서 미국이 이라크나 아프간과 전쟁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경제 기간 시설들이 자주포 사거리 안에 있다는 것도 상황이 다르다. 승리해도 현재의 북한 꼴이 되고 만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평화를 위한 노력이 담긴 남북합의서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