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언론의 역사는 백 년 남짓하다.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가 창간된 것이 1882년이다. 한성순보는 관보였고, 한문을 썼다. 4년 뒤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한글을 사용한 독립신문이 창간됐다. 실질적인 한국 근대언론의 시작은 이때부터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일제의 통치를 받는다. 해방이 되고 난 뒤에는 미군정의 통제와 직면한다. 성장의 시작을 외세의 억압과 간섭으로 시작한 언론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그리 호의적인 환경을 만나지 못한다. 초대정권인 이승만 정권부터 1987년 민주화 때까지 장면 정권을 제외한 나머지 정권은 하나같이 혹독한 언론탄압을 가했다. 한국 언론은 순응과 저항을 되풀이하면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기자들은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을 언론자유와 동의어로 여기는 '저항의 미학'을 공유했다.
'매일신문'은 정치권력에 저항한 사건으로 '한국언론사'에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1955년 대구매일테러사건이다. 이 사건은 대구매일신문 주필 최석채가 '학도를 정치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학생들을 관제데모에 동원하는 폐습을 비판하자 자유당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 20여 명이 신문사를 습격해 직원을 폭행하고 기물을 파손한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 당시 대구매일신문은 경향신문과 더불어 가톨릭재단이 운영하는 비판적인 양대 신문으로 꼽혔다. 당연히 신문을 여당지로 길들이려는 이승만 정권과 사이가 좋을 리 없었고, 경찰과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경찰은 사설이 나가자 이를 비판하는 관변단체의 '이적행위'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최석채 주필을 구속했다. 반면 대구매일신문 테러사건에 대해서는 경북도경 사찰과장이 "백주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는 말을 남겨, 후세에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됐다. 주목할 점은 이 사건 이전에 4200부였던 발행부수가 이 사건 이후 1만 부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정치권력에 용감하게 저항하는 정의로운 언론에 대해 눈 밝은 독자들은 구독으로 지원을 했던 것이다.
두 번째 사건은 19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이다.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은 박정희 정권 때 집권여당인 공화당이 언론의 자율적 규제를 표방하며 발의한 언론규제 법안에 대해 언론사들이 연대해서 저항한 사건이다. 이 악법 반대투쟁 과정에서 한국기자협회가 탄생할 정도로 언론사들의 연대투쟁은 거세었지만, 정부의 압력 강화로 이탈자가 속출해 나중에는 21개사가 정부 편으로 돌아서고 조선, 동아, 경향, 대구매일 등 4개 신문 만이 반대를 고수하는 사태가 연출됐다. 이 때문에 마지막까지 남은 4개 신문은 관공서 신문구독 중지, 은행융자 제한 및 기존 대출금 회수, 신문용지 가격 특혜 배제, 광고게재 중단, 취재활동 제한 등의 보복조치를 당했다.
1946년 창간된 매일신문이 현재까지 정치권력의 통제에 대응하는 방식이 특별히 남달랐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 신문처럼 저항과 순응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좀 더 먼저 저항하고, 좀 더 나중까지 버틴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론을 알아보는 눈 밝은 독자들은 1955년보다는 지금이 더 많다. 창간 70주년을 맞아 과거의 저항적 전통을 살려 현재의 상업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앞으로 매일신문이 해 나가야 할 과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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