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을 열자
아내는 이미 다 내린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예
뭣하러 묻나
종일 타향 강가에 앉아
해지는 것 보고 왔다
혼자 갔다 왔어예
그래 혼자서
백로 앉은 나락밭에
흰구름 가는 것 보고 왔다
경운기 소리 끝난 들 끝
먼 솔숲 속에 불켜이는 것 보고 왔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자꾸 말했다
흰모래 언덕에 밤드는 것 보고 왔다
아무도 없는 흰모래 언덕에
밤드는 것 보고 왔다
(전문. 『보리 곡식 걷을 때의 슬픔』. 그루. 1990)
지역에 산다는 이유로 저평가된 시인들이 있다. 그들은 이른바 문학 권력에서 멀다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잊혀간다. 이문길 시인이 그러하다. 그 어떤 독특성이 두드러지는 시인은 아니지만, 잔잔하게 다듬어진 그의 시는 분명 기억되어져야 한다.
이 시는 추측건대 50세 무렵,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시인의 쓸쓸한 마음의 풍경이다. 홀로 흰 모래 언덕 강가에 앉아 흰 구름이 지나가고, 노을이 지고, 마을에 불이 켜지는 것을 오래 바라보면서 '밤드는 것'처럼 자신의 삶에 스며드는 어두운 시간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풍경은 그를 기다리며 어둠 속에 서 있는 그의 아내를 통해 보여진다. 아내에 대한 말대꾸에서, 아내에게 말하지 못하는 속 이야기를 통해 그의 풍경은 그려진다. 흔히 말하는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의 무뚝뚝함과 기다리고 순종하는 아내의 모습이다. 하긴 시인의 아내로 사는 것은 참 쓸쓸한 일이 아닐는지. 미안하고 미안한 일이어서, 시인은 곳곳에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심어놓았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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