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문학노트] 배 그림자 풀어지지 않는다 -함민복의 '그리움'

수만 결 물살에도 배 그림자 풀어지지 않는다 (함민복 '그리움' 전문)

시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고 합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시를 말하지만 아무도 시인을 직업으로는 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도 시집을 돈 주고 사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자위가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도시 곳곳을 떠돌다 우연히 만난 강화도에 보증금 없이 월세 10만원짜리 폐가를 빌려 둥지를 틀었다는 함민복. 그는 "방 두 개에 거실도 있고 텃밭도 있으니 나는 중산층"이라고 말합니다. 자본이 전부인 세상에서 자본을 넘어 새로운 삶을 설계하는 그의 삶이 그의 시에는 보입니다. 시집 한 권 팔리면 시인에게 들어오는 것은 삼백 원, '긍정적인 밥'에서 그는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이라면서 푸른 바다처럼 마음 상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함민복의 시에는 금방 지은 밥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김과 같은 온기가 숨 쉬고 있습니다. 어쩌면 함민복에게서 시의 미래를 볼 수도 있습니다. 자본의 시대에 자본을 넘어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길. 그런 그에게도 수만 결 물살에도 풀어지지 않는 배 그림자 같은 것이 있었나 봅니다. 그는 그것을 그리움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를 만나기 위해 강화도로 가야 하는데 내 발길은 자꾸만 진도로 향했습니다. 거기에 내 그리움의 바닥이 머물고 있었으니까요. 처음으로 만나는 진도 바다와 땅은 평안했습니다. 울돌목, 녹진, 세방, 세포, 팽목, 울포, 회동, 벽파, 운림산방. 짧은 시간에 참 많은 풍경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풍경을 만났어도 내 안의 배 그림자는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랬구나. 나는 풍경을 풍경으로 만나는 마음을 잊어버렸구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잃고 살았구나. 스쳐 지나가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이름을 불러보다가 지나쳐버리기도 했구나.' 바로 옆에 있는 것,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것을 그리워하진 않습니다. 다가갈 수 없는 것, 금지된 것, 이제는 지나가버린 것,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향해 그리움은 달려갑니다. 다가가지 못한, 소멸되어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진도로 달려갔지만 나는 결국 그리움의 가장자리에도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정말 소멸되는 것들 앞에서는 무방비입니다. 그냥 보내야만 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그러면 보내야 합니다. 부재(不在)해야 그리움이 남으니까요. 진도에 살을 묻고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말합니다. 여긴 볼 것이 그리 많지 않다고. 관광지는 아니라고.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간다고. 내가 만난 건 바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야기이고 그들의 노래입니다. 보러 가는 것이 관광이라면 만나고 들으러 가는 것이 여행입니다. 나는 여행 간 것이니까요. 그리고 가슴 가득 슬픔과 그리움을 안고 돌아왔으니까요. 손으로 움켜잡을 수는 없지만 여전히 만나고 싶은 풍경 속에 있으니까요. 그 그리움조차 사라지면 내 삶이 무너질 것 같으니까요.

시간은 기다리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것과 저기 있는 것, 그 '사이'에 시간이 흘러갑니다. 시간은 이야기를 남기고, 생채기를 남기고, 웃음과 울음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기억으로 남깁니다. 기억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다가 이따금 감춰진 얼굴로 드러나는 표식입니다. 아마도 오랜 시간 진도에 대한 그리움은 남아서 나를 채울 것입니다. 세월이 세월을 부정하지는 못할 테니까요. 바람이 부럽습니다. 머물고 싶을 때, 머물고 싶은 데 마음대로 머물 수 있으니까요. 함민복이 내 맘속에 머뭅니다. 불현듯 함민복이 부러웠습니다. 수만 결 물살에도 풀어지지 않는 배 그림자를 볼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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