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7일, 애인이 오지 않는 날 애타게 기다리기도 한다. 하지만 오지 않은들 그게 무슨 큰일이랴. 남편이라면 내게 오지 않는 것이 상처를 주겠지만 애인이니 조금의 쓸쓸함만을 남길 따름이다. 신통하게도 아주 변심하여 영원히 안 와버릴 애인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 (은희경, '빈처')
30대 중반의 어느 날, '이렇게 살다 내 인생 끝나고 말지' 하는 생각에 노트북 컴퓨터 하나 달랑 챙겨들고 지방에 내려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은희경이라는 인기 소설가의 출발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소설가들에 비해 조금 늦은 출발이었던 셈이지요. 은희경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있습니다.' 절실하고 진실하다고 보이는 모든 사랑은 그녀의 언어 속에서 냉정하게 진단됩니다. 몰입하는 독자의 뒤통수를 권투의 잽을 날리듯 톡톡 치다가 불만에 가득 찬 독자의 턱을 향해 큰 주먹을 날리기도 합니다. 그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성은 상투성에 다름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연으로 이루어진 풍경들이 상황에 의해 채색된 것이 필연인 뿐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은희경에 대한 찬사를 했지만 나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봤자 그게 그거지 별것 있겠느냐는 생각이 내 내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희경의 소설에는 별것이 있었습니다. 은희경의 소설은 일단 재미가 있습니다. 읽기 시작하면 계속 그녀의 이야기 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 재미는 근본적으로 일상적인 삶에 대한 진실한 탐구에서 주어집니다.
'빈처'를 이십 년 만에 다시 읽었습니다. '빈처'는 1996년에 나온 그녀의 첫 번째 단편집 '타인에게 말 걸기'에 실린 작품입니다. 공지영의 '길'도 그렇지만 이 작품도 은희경의 다른 작품보다는 그리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드러난 풍경보다는 숨은 풍경들이 삶을 채우는 경우가 훨씬 많으니까요. 이 소설집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말 걸기를 시도합니다. 그런 점에서 '빈처'도 타인에게 말 걸기의 한 양상입니다.
'빈처'에서 남편인 '나'와 아내인 '그녀'는 우리 사회의 기본 틀 속에서 요구하는 과정을 충실히 밟아 온 사람들입니다. 두 사람은 대학에서 만나 결혼 후 두 아이를 낳았으며 남편은 생활 전선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아내는 두 아이의 양육이라는 고된 노동과 남편의 뒷바라지에 전념합니다. 이들의 일상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자연스러워 보이는 일상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 내고 그 생활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이들 생활의 건조함과 공허함에 이내 실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물론 그러한 실망조차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의 단면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그녀가 일기를 쓴다는 걸 몰랐다'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화자가 남편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남편인 화자는 아내의 일기를 우연히 보게 됨으로써 아내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던 화자가 '나는 독신이다'라고 선언하는 아내의 일상을 만났을 때의 당혹스러움, 그것은 사실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 스스로에게도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옵니다. 아내는 '나'를 서슴없이 애인이라고 명명합니다. 남편을 애인이라고 명명하는 아내의 내면에 담긴 쓸쓸함은 가족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에 대한 냉소 담긴 반격일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라면 내게 오지 않는 것이 상처를 주겠지만 애인이니 조금의 쓸쓸함만을 남길 따름이다'는 말은 또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요?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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