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전 대구 앞산공원관리소장 권영시 씨

비슬산·대구수목원·앞산, 다시 비슬산으로…산 지킴이로 평생 살았네요

"40여 년 공직 생활 중 '비슬산 참꽃축제'를 전국적 행사로 활성화 시킨 것이 가장 큰 보람으로 남습니다." 권영시 전 앞산공원관리소장이 비슬산 참꽃 군락지에서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복지부동, 보신(保身)주의, 철밥통…. 공무원 세계를 비하하는 표현들이다. 물론 무사안일에 빠진 소수 공직자들만 해당된다. 따지고 보면 공무원만큼 주변을 또는 사회를 쉽게 바꿀 수 있는 집단도 드물다. 자신들이 제도의 제1선이요, 정책의 직접 집행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권영시(64) 전 앞산공원관리소장은 위의 모범 사례에 둘 만하다. 40여 년 공직생활 동안 그의 주된 보직은 산림, 공원, 녹지 분야였다. 그의 임무는 늘 새로운 사업, 새 제도, 정책과 씨름의 연속이었다. '산속에서 등산로, 휴양림, 공원 만드느라 진땀 좀 뺐겠군' 하고 쉽게 넘겨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가 이룬 일은 생각보다 많고 기대보다 훨씬 컸다. 대구 시민은 물론 전국의 관광객들이 그가 이룬 사업의 수혜 대상이 될 정도로. '철밥통'을 버리고 '철(鐵)의 행정'을 이룩한 권영시 전 소장을 만났다.

◆비슬산 자연휴양림 조성 총감독

경북 월성군(현 경주시) 공무원이었던 권 소장이 달성군(당시 경북도)으로 전근을 온 것은 1987년. 2004년까지 전국에 자연휴양림 100곳을 건립한다는 계획이 발표되던 때였다. 영림서(營林署, 현 지방산림관리청)에 배치된 권 소장에게 비슬산 휴양림 조성 책임이 배당된 건 그 무렵이었다.

"제가 일을 피하는 사람은 아닌데 당시엔 정말 황당했습니다. 경북에서 첫 사업이라 행정절차, 법규도 생소하고 모든 게 낯설었죠. 산림청에 하나하나 물어가며 일을 배워 나갔습니다."

1992년 비슬산 자연휴양림 지정 승인이 나고 이듬해 예산도 통과됐다. 1993년도 첫 예산은 5억원. 진입로 포장비도 안 되는 예산이었지만 우선 벌여놓고 보자는 뚝심으로 일을 추진해나갔다.

"사업비를 따내기 위해 산림청으로, 도의회로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습니다. 비슬산 용리에 건물들이 들어서고 농로 수준이었던 진입로를 확장, 포장하면서 어느 정도 외관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휴양림이 완성된 후에는 대견사까지 임도, 등산로 공사도 같이 추진하며 현재의 쾌적한 관광 인프라가 모두 갖춰지게 되었다.

◆전국 축제 '비슬산 참꽃축제' 기획

휴가까지 반납해가며 먼지 속에서 공사를 지휘하기를 몇 년, 어느덧 건물들의 외형이 잡혀갔다. 휴양림이 문을 열자마자 시민들 예약전화가 쇄도했다. 휴양림 사업이 무사히 안착하면서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공직에 입문한 후 맨땅에서 일궈낸 첫 작품이었다.

그러나 일을 찾아나서는 그의 성격은 그를 안주하게 놔두지 않았다. "휴양림이 완성되니까 이곳을 전국적인 명소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군요. 그때 제 머리를 스친 것이 비슬산 정상부의 참꽃 군락지였습니다. 곧바로 '비슬산 참꽃축제'를 기획했죠."

마침 당시에 정상까지 임도가 닦인 직후라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예산이었다. 대구 시청을 문지방이 닳도록 오가며 합의한 끝에 1억7천만원의 예산이 편성됐다. 지역축제 최고 히트작인 비슬산 참꽃축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후 '얼음 동산 축제'까지 열리면서 이제 비슬산은 사계절 전천후 관광지가 되었다. 지금은 시민들이 사철 오가며 축제를 즐기지만, 불과 20년 전 '대구의 약간 알려진 산'에 그쳤던 비슬산이 연간 수천 대 관광버스를 불러들이는 기적을 연출한 이면에는 한 공직자의 숨은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자연휴양림, 참꽃축제, 얼음 동산의 연이은 히트, 이 모든 일들이 그냥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권 소장의 열정과 그 열의에 감동한 대구시'지방의회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초기 행사 입안을 적극 도와준 선배가 있었고 '예산이 그걸로 되겠어?'라며 봉투 하나를 더 얹어준 단체장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구수목원서 앞산공원관리소장으로

비슬산 휴양림 이후 권 소장은 대구수목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개장 2년 된 수목원은 선임인 이정웅 씨가 초창기 밑그림을 잘 완성해 크게 손볼 일은 없었다.

"부임해서 수목원을 둘러보니까 조경은 잘돼 있는데 시민들이 쉴 그늘이 없는 거예요. '아! 방문객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줘야겠구나' 생각하고 바로 실행에 옮겼어요."

이때부터 대구시내 공사장들을 돌아다니며 대형목, 노거수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시아폴리스 공사 때 나온 수십 그루 느티나무들이 폐목 위기를 넘기고 수목원에 뿌리를 내렸다. 지금 수목원에 있는 거목들은 모두 권 소장의 손길과 발품이 닿은 것들이다.

달서구청으로 옮겨온 그는 '완충 녹지를 활용한 담장공원'으로 다시 한 번 '안타'를 치고 2009년 마지막 근무지인 앞산공원관리사무소장로 부임했다. 처음 몇 달은 앞산 전 지역을 답사하고 순찰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대구 한복판에 이렇게 멋진 산이 위치하고 자락마다 수많은 골이 있는 데에 놀랐다. 천혜의 도심 공간 앞산의 부가가치를 높일 궁리에 골몰하던 중 권 소장은 자신의 '제2 히트작'을 탄생시킨 결정적인 힌트를 얻게 된다.

"앞산에 10여 개 골이 있는데 이 골 사이를 유심히 살피면 토끼들이 다니는 길이 있다"는 제보였다. 이튿날부터 배낭을 메고 상동, 파동, 대명동부터 월배 달비골까지 산자락을 훑었다. 계곡과 계곡을 잇고 골과 골을 연결하는 작업에 앞섰다.

애꿎은 공익요원들이 노역에 동원되고, 그가 속해있던 문인협회 회원들이 강제로 부역에 불려 나왔다. 현재 시민들의 산책길로 인기를 얻고 있는 13.6㎞ '앞산 자락길'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는 이런 모든 계획 속에 많은 섭리들이 있었고, 어려울 때마다 조력자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나만 믿어'하며 예산을 따준 의회 의장이 있었고, 일이 꼬일 땐 내 일처럼 시장과 담판 자리를 마련해준 상급자도 있었다. 그 덕에 그는 퇴직 때 공무원의 꽃이라는 서기관에 올랐고 공직자의 영예라는 녹조근정훈장까지 받았다.

"그냥 저는 무료한 일상을 견디지 못해요. 일을 만들어서라도 하는 편이지요. 제가 의식적으로 나서서 철밥통을 깨려고 한 적은 없어요. 다만 보신주의, 무사안일 같은 옷이 저한테 맞지 않았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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