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는 고대부터 달구화, 달구벌, 달불, 달성 등으로 불려 왔으며 큰 언덕이라는 대구의 옛 지명 달구벌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익숙하게 불리고 있다. 대구라는 이름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 군현제 개편으로 당시 달구화현을 대구현으로 고쳐 부르며 처음 생겨나게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팔도제에 따라 경상도를 관할하는 경상감영이 경주, 상주, 성주, 달성, 안동으로 옮겨 다닌 끝에 선조 34년(1601) 최종적으로 대구에 정착하면서 대구는 명실상부한 영남의 중심지로 뿌리 깊고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게 되었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시가지 일대가 대구부로, 나머지 지역은 달성군으로 편제되었다. 당시 달성군의 관할 지역은 성북, 공산, 해안, 수성, 가창, 달서, 다사, 하빈, 성서, 월배, 화원, 옥포, 현풍, 유가, 구지, 논공 등 총 16개 면이었으며, 대구부는 지금의 중구 일원 정도였다.
1914년 3월 1일 개청 당시의 관할 지역 중 절반 정도를 분가시키고 현재는 3읍 6면의 95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는 달성군은 지난 2013년 개청 100주년을 앞두고 전국 최초로 관할 95개 법정리의 마을 깃발을 만든 바 있다. 깃발은 고대부터 한 집단의 표상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집단의 구심점으로 기능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 태극기는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국기로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라왕이 화원의 아름다움에 반해 아홉 차례나 들렀고 그때마다 마을에서 빛이 났다는 화원읍 구라리, 신라시대 가락국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마을 뒷산에 성을 쌓고 활과 화살촉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자 대나무를 많이 심었다는 다사읍 죽곡리, 임진왜란 당시 일본인 사야가(김충선)가 귀화하여 정착하고 사슴을 벗 삼아 살아가리라 하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는 가창면 우록리,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화를 당한 사육신의 유일한 후손으로 종이 낳은 딸과 바꾸어 목숨을 보전한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후에 복권되어 터를 잡은 하빈면 묘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는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하는 도동서원이 있는 곳으로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고 해서 도동으로 사액되고 마을 이름도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구지면 도동리 등등, 달성의 마을 깃발들은 마을의 문화와 정신이 아름답게 녹아 저마다의 이야기를 뽐내고 있다.
마을은 포근하고 아늑한 삶의 보금자리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이기도 하다. 산업화되고 도시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잊혀가는 마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되살리고 조상의 얼을 지킴으로써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고 내일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달구벌의 온 마을마다 마을 닮은 깃발들이 나부끼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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