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양적완화'를 두고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던 한국은행이 한발 물러섰다. 2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집행간부회의를 열고 "기업 구조조정이 우리 경제의 매우 중요한 과제이며,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것이다"고 했다. 사실상 한국판 양적완화 수용 의사라는 분석이다.
◆양적완화 수용, 한국은행 백기 투항(?)
이 총재의 이 같은 발언은 원론적인 입장을 되풀이한 것일 수도 있지만 기업 구조조정 추진 과정에서 한은의 역할 확대를 기대하는 정부의 요구가 있은 뒤에 나온 것이어서 한은이 사실상 정부안을 수용하면서 백기 투항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앞서 지난달 29일 윤면식 한은 부총재보는 "기업 구조조정 지원을 위해 국책은행에 자본금 확충이 필요하다면 이는 기본적으로 재정의 역할"이라고 말해 사실상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바 있다.
이후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일 "가능한 재정과 통화정책 수단의 조합을 생각해보고 있다. 한국판 양적완화는 구조조정 재원 마련에 있어 유력한 아이디어"라고 말해 한은을 공개적으로 압박해왔다.
한은이 '한국판 양적완화'에 돌입해야 한다는 사회적 목소리가 커진 것도 한은의 입장 변화로 이어졌다. 한은 내부에서조차 윤 부총재보의 발언이 자칫 박근혜 대통령이 주문한 한국판 양적완화에 한은이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는 데 극도의 경계감을 표시했다.
한은이 정부와의 기싸움에서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보임에 따라 구조조정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 참석 차 독일 출장(2~5일)에 나선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주열 한은 총재가 프랑크푸르트 현지에서 국책은행 자본 확충과 관련된 '한국판 양적완화'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한은 발권력 동원에 대한 합의를 전격 도출해낼 것이란 기대섞인 예상도 나오고 있다.
◆구조조정 위한 실탄 마련이 논란의 시작
부실 위험에 빠진 조선'해운업의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서 구조조정을 위한 실탄(재원)을 누가 분담할 것인지를 두고 불거지고 있는 논란이다. 특히 조선'해운업의 경우 구조조정 비용이 수조원대에 이를 수도 있어 과연 국책은행(중앙은행)이 부담을 져야 하는 게 적절한지를 두고 정치'경제는 물론 사회 전반적으로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적완화 정책을 오로지 미국을 비롯한 기축 통화국들만 취할 수 있는 정책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갑자기 정부가 양적완화를 해야 한다고 하니 그 실현 가능성과 부작용을 두고 논쟁이 일고 있는 셈이다.
원래 양적완화란 금리를 0%까지 낮췄는데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을 경우 중앙은행이 직접 시중은행의 채권을 사들이며 돈을 더 푸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중앙은행이 찍어낸 돈을 조선'해운업 같은 특정 산업의 구조조정 자금으로 쓰인다고 해서 앞에 '한국판'이라는 말을 붙였다. 결국 한국판 양적완화는 한국은행이 키를 쥐고 있다.
그렇다면 정부가 왜 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중앙은행의 부담을 요구할까.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부실채권을 처리하려면 은행은 건전성 면에서 부담을 안게 된다. 특히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경우 조선과 해운업 등 구조조정 대상 기업에 대한 대출이 많다. 이 금액만 20조원이 넘는데 구조조정에 들어가면 이 금액이 바로 손실로 이어지니까 자본 확충이 필요한 상황인 셈이다. 그래서 이들 두 은행의 자본 확충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물가'금융 안정 등 본연 임무 훼손 우려
정부의 경우 한국은행에 국책은행 출자를 요구하는 대신 국민 세금으로 구조조정을 지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지출, 즉 국민 세금을 쓰기 위해서는 국회의 예산 편성 동의를 거쳐야 한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야당이 정부안을 반대하면 원안 통과가 어렵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한은은 금융통화위원회 의결만으로 국책은행 출자를 결정할 수 있다. 실제 한은은 지난해 가계부채 대책의 일환으로 안심전환대출을 지원하기 위해 금융통화위윈회 결정으로 주택금융공사에 2천억원을 출자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반면 한은의 입장은 다르다. 명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히지는 않고 있다. 한은은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필요한 역할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수행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혀왔다. 다만, 내부적으로는 국책은행 자본 확충이 물가 안정, 금융 안정이라는 한은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난다고 보는 인식이 강하다. 한은의 독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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