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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평생 웬수' '열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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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을 설명해 맞히는 TV 노인 프로그램에서/ 천생연분을 설명해야 하는 할아버지/ '여보 우리 같은 사이를 뭐라고 하지?'/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 손가락 넷을 펴보이며/ '아니, 네 글자'/ '평생 웬수'

안동 출신 황성희 시인의 '부부' 중 일부이다. 언젠가 저 TV프로그램을 나도 본 적이 있는데, 배꼽을 잡을 정도로 웃은 기억이 난다. 범인이 보기에 우습기만 했던 장면이 시인의 언어로 다시 조립되고 보니 왠지 모를 공명이 생긴다. 서로를 만나 사랑하고 그래서 결혼하고 평생을 함께하는 사람들인데, 삶 속에서 서로를 '살아내다' 보니 어느새 웬수가 되고 말았나 싶어 이 땅에 사는 남편의 한 사람으로서 씁쓸하기도 하다. 이 세상의 남편들은 아내들의 웬수이다. 그 웬수를 뭉개는 우스갯소리도 수없이 생산되고 있다. 영식님'일식씨'이식군'삼식놈이 생겼고, 이사 갈 때 남편은 (자신을 버리고 갈까 봐) 아내가 사랑하는 애완견을 꼭 안고 있다는 얘기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남편들이라고 해서 할 말이 없을까. 남편들의 입장도 별반 다르지는 않다. 아내가 남편에게 퀴즈를 냈다. "여보, 퀴즈 하나 낼게 맞혀봐요. 이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바다는 '썰렁해'고 가장 따뜻한 바다는 '사랑해'래. 그럼 가장 뜨거운 바다는 뭘까~요?" 남편이 얼른 대답을 못하자 아내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봉~ 지금 나한테 해주고 싶은 말 있잖아~." 남편이 그제야 알았다는 듯 대답했다. "아~ 열바다?"

피장파장이다. 존재만으로도 열을 받을 정도이니 남편에게도 아내는 '평생 웬수' 못지않다. 원래 부부는 전생에 악연을 맺은 원수끼리 이생에서 다시 만난 사이라고 하지 않는가. 전생의 원수가 부부로 만나 살면서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면서 그 업을 씻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전생의 그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어쨌든 남편과 아내는 이생에서도 '평생 웬수'가 되고 '열바다'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평생 웬수와 열바다였던 건 아니었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창밖을 보던 아내가 문득 한마디 툭 던졌다. "저 남자 정말 되게 매너 없네."

아내가 가리키는 곳을 보며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아니, 아가씨는 뒤에서 따라가는데 남자가 저렇게 주머니에 손 찔러넣고 혼자 가잖아."

"흥, 우린 안 그랬나. 만날 싸워서 매일 따로따로 걸어다닌 기억밖에 난 없는데."

"그랬나? 내 기억엔 당신이 내 손 차갑다고 항상 당신 바지 주머니에 넣어줬던 기억밖에 없는데…."

아내의 뇌리에 남아 있는 연애 시절의 내 모습에 어디 웬수가 있는가. 아내는 비록 케케묵은 추억 쪼가리일 망정 한 번씩 꺼내보며 견디고 사는 모양이다. 우리 부부뿐만 아니라 그게 오래된 부부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웠던 추억뿐만 아니라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견뎌낸 정 또한 현재를 견디는 힘이 되는 것 같다. IMF 시절 그 어렵던 때를 함께 견디고 북돋워 준 사람이 아내 말고 누가 있었을까. 그 엄중한 시절을 함께 견디며 만들어낸 이야깃거리도 적지 않다. 지금도 우리는 가끔 그런 옛날 얘기를 되새긴다.

아내들이여, 이번 주말 아침 거실을 한 번 둘러보라. 소파에 껌딱지처럼 늘어붙어 TV 채널만 돌리고 있는 '평생 웬수'가 보이는가. 남편들이여, 피곤한 당신을 잠시도 쉬지 못하게 이리저리 몰아붙이며 허드렛일을 시키고 잔소리를 해대는 '열바다'가 보이는가. 하지만 이날 하루만은 서로를 좀 봐주자. 측은지심을 가지고 등도 한 번씩 두드려줘 보자. 설거지하는 아내를 뒤에서 살포시 안아도 보자. 낮에는 교외로 나가 칼국수라도 한 그릇 먹고 오자. 저녁에는 소주도 한 잔 나누고. 부부의 날이지 않은가. 웬수니 열바다니 해도 옆에 있을 때가 그래도 좋은 법. 황 시인도 그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랬듯이 옆에 없으면 '사무치게 그리운/ 평생의 웬수'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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