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총선 후 박근혜 대통령은 예전과는 달리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지난달 말 3년 만에 언론사 편집'보도국장들과 오찬 간담회를 했다. 지난 13일에는 여야 3당 원내지도부와 회동하고 분기별 회동 정례화에 합의했다.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임에는 분명하다. 총선 전만 해도 '국회 탓' '야당 탓'을 하던 박 대통령이 여당의 총선 패배로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기에 기대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박 대통령을 지켜본 이들의 생각은 '달라진 것이 없다'였다. 박 대통령은 정치 환경이 바뀌었다고 자신의 원칙이나 스타일을 버릴 분이 전혀 아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에도 먼저 북한 도발 여부를 물었고, 흉기에 찔려 수술받고는 선거 상황부터 묻는 분이 그깟 여소야대가 됐다고 해서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3당 지도부 회동 후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아 박 대통령의 본심을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먼저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의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제창' '합창' 논란이다. 5'18기념식이 국가 행사가 되지 않았으면 시비를 가려도 되겠지만, 이왕 판이 깔린 마당에 유족이나 야당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이 맞았다. 호남 민심을 잡으려는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당의 반발을 부를 것이 뻔한데도, 정부는 사소한 원칙에 집착했다. 세상살이에는 원칙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관용이 더 중요할 때가 있는데, 이번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새누리당 내분 사태도 마찬가지다. 흔히 친박과 비박의 주도권 싸움이라 말하지만, 그 배후가 청와대임을 누구나 안다. 친박 인사들은 박 대통령의 의중을 살피고, 적극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부류다. 지난 17일 비대위'혁신위 선임을 위한 전국위 회의가 무산된 것은 청와대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비대위에 유승민 의원과 친한 인사들이 포진한 것은 박 대통령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행위였다.
대통령 비서실장에 70대 중반의 이원종 전 충북지사를 임명한 것도 박 대통령만의 스타일이다. '박 대통령은 오빠를 좋아해'라는 개그가 나올 정도로 또다시 노련한 비서실장이 등장했다. 가뜩이나 역동성과 진취성이 떨어지는 청와대에 나이 든 참모가 과연 맞을지 모를 일이다.
이 사건들이 얼핏 별개의 일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박 대통령이 집권 이후 일관되게 고수한 스타일이다. 박 대통령 같은 원칙주의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약점은 '상상력과 유연성의 결핍'이다. 박 대통령은 새로운 걸 받아들이길 꺼리는 경향이 있고, 한 번 옳다고 믿은 것은 끝까지 지킨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너무 뻔하다. 남은 1년 9개월 동안 대통령은 정치권 탓을 하고, 야당은 사사건건 정부의 발목만 잡으려 들 것이다. 현재 대통령과 야당은 20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있을 뿐, 19대 국회 때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는 둘 사이는 계속 멀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어른에게 옆집 아이가 매일 혀를 쏙 내밀고 놀린다고 하자. 어른이랍시고 아이에게 훈계를 늘어놓거나 머리를 쥐어박는다고 말을 들을까. 아이에게 사탕도 사주고, 만원짜리 한 장도 쥐여 주면서 인간적인 정을 보여주는 것이 먼저다. 그런 다음 '어른에게 그런 짓 하면 안돼'라고 살살 구슬리고 가르치면 둘 사이는 좋아질 것이다. 이것이 세상사는 이치다.
어른이 아이와 멱살잡이를 해서는 제대로 된 관계가 될 수 없다. 대통령이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야 야당을 견인할 수 있다. 우리의 야당은 불행하게도 철없는 아이와 같을 때가 많다. 대통령 개인의 원칙도 중요하지만, 상대에 대한 감화, 설득이 우선이다. 당장 스타일을 바꾸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다. 자칫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만 남을까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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