휙 밥상이 날아갔다. 첫날밤을 보낸 새신랑의 아침상이 숨도 안 쉬고 대청을 지나 눈 쌓인 마당 가운데 폭탄처럼 떨어졌다. 갖은 음식들은 색색의 무늬를 만들며 흩어지고 잔칫집은 삽시간에 초상집으로 변했다. 밥상을 걷어찬 신랑은 눈이 덮인 보리밭을 지나 신작로를 향해 달린다. 같이 밥을 먹던 집안 오빠들도 이어달리기 선수들처럼 뒤를 따른다. 낮은 돌담 너머로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친지들은 걱정 반 구경 반으로 수군대기 시작한다.
"부잣집 외아들에 공부도 많이 했다더니 저렇게 시근이 없을 수가 있나. 그중에 시어미는 청상과부라면서. 첫날밤을 보냈으니 이제는 물리지도 못하고 그 시집살이 모시옷 살 비치듯 훤하고 말고." 제각기 판단을 내린다.
신랑의 눈코가 제자리 박혔는지도 모른 채 하룻밤을 보내고 약 먹은 쥐처럼 떨고 있는 내겐 누구 한 사람 안중에도 없다. 화탕지옥이 이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지난밤에 처음 본 통나무 둥치 같은 내게 읍에서 온 신랑은 만정이 떨어진 것일까. 나는 영문도 모르고 오만 생각이 한내 물줄기처럼 꼬리를 물었다. 한편으로는 신부가 아무리 맘에 들지 않아도 저런 개망나니 짓을 하는 남자와는 일찌감치 그만두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하는 마음이 더 컸다.
한참이 지나서야 오빠들은 정승 모시듯 신랑을 데리고 왔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는지 작은아버지와 엄마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버릇없다고 꾸짖을 줄로만 알았던 엄마는 갑자기 "그래 눈바람 좀 쏘이고 왔는가. 우리 예 서방 키가 커서인지 옥양목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눈 위를 뛰어가는 모습이 마치 학이 나는 것 같았다네. 장난으로 그런 것이니 고깝게 여기지 말게. 우리 집안 풍습이 신랑 다루는 날은 다 그렇게 한다네." 세 살배기 아기를 어르듯, 또 학 같은 선비를 대하듯 조곤조곤 타일렀다.
이 웃지 못할 현실 앞에서 엄마는 어린 딸의 장래를 위해 얼마만큼의 인내와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지를 한없이 고민했음이 역력했다. 시집가기 몇 해 전,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건강이 나빠진 엄마는 아직 출가시킬 네 자식들이 큰 걱정이었다. 나이가 꽉 차지 않아도 웬만하면 혼사를 성사시키려고 수소문을 했다. 마침 친척 한 분이 소개를 해서 오빠와 올케만 보고는 좋다고 다급히 날을 잡다 보니 섣달 단대목이었다. 스무 살에 그 흔한 맞선 한 번 못 보고 이런 신랑을 만났으니 엄마도 나도 억울하고 허무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구식으로 혼례를 치르면 이튿날은 신랑 알음이라며 짓궂은 장난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신랑의 사람됨을 가늠하는 시험 같은 놀이였다. 한편으로는 자기 집 여식이 시집살이를 덜 하게끔 미리 본때를 보여 기를 꺾어 보자는 뜻도 있었을 게다. 준비해 둔 광목에 두 발목을 꽁꽁 묶은 뒤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방망이로 발바닥을 치면 신랑은 장모님을 부르고 신부를 불러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아니면 신랑 밥그릇 속에 간장종지나 나뭇잎 같은 것을 넣어 두고는 맛있게 밥을 먹던 신랑이 그것을 보고 화를 내거나 오늘처럼 밥상을 던지면 신부는 그의 성정을 미리 알고 매사가 살얼음판을 걷는 삶이 시작되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에 그 종지나 나뭇잎마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마음이 바다 같아서 아내는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까지 원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옛 어른들의 지혜로움이 담겨 있는 풍습이다.
옻칠 밑으로 소나무의 결이 물결처럼 고운 상 위에 앉은 음식들은 그야말로 사또 곰배상이다. 오빠들이 힐끗힐끗 신랑을 본다. 맛있게 서너 숟갈 뜨던 신랑이 수저 끝에서 달그락거리는 종지를 보자마자 이렇다저렇다 말도 없이 싸움장에 나가는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밥상을 걷어차고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흔히 신혼길이 이혼길이 되었다는 말이 이런 상황을 두고 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올해도 유난히 설 대목에 눈이 많이 온다. 마당에 쌓이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반백 년이 지난 그때의 일들이 봄밤의 꿈처럼 어슴푸레 지나간다.
설이 며칠 남지 않아서 시렁에 앉아 나를 보고 있는 상을 내려 곱게 닦는다. 엄마는 이 상을 사기 위해 장닭 세 마리를 봉태기에 담아 이고 발목까지 차는 눈길을 걸어서 읍내 오일장에 갔다. 고무신이 젖어 발이 얼어붙어도 며칠 뒤 새 사위한테 맛있는 음식을 올려 줄 것을 생각하니 걸음마다 웃음꽃이 피었다고 했다. 그러나 운명은 엄마의 그 소박한 기쁨마저 하루아침에 번개처럼 앗아가고 말았다. 그나마 한쪽 다리만 다친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며 절름발이가 된 상을 명주실로 찬찬히 감아 신행길에 딸려 보냈다.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 상을 보며 참고 견디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을 게다.
살가운 눈길 한 번 마주하지 못한 시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도 지하에서 걱정하실 엄마와 이 상을 보면서 스스로 담금질을 하며 견디었기에 오늘따라 더욱 소중히 여겨진다.
지난번 눈길에 미끄러져 다리를 다친 남편이 상을 닦고 있는 내게 핀잔을 준다.
"아직도 그 상 안 버렸나." 나도 모르게 버럭 간 큰 대꾸를 했다.
"이젠 절뚝거리는 당신은 내 맘대로 버릴 수 있어도 이 상은 죽을 때까지는 못 버려요."
남편은 새삼 쑥스럽기도 하고 입가에 주름이 늘수록 당당히 맞서는 내가 어처구니가 없는지 자기 방으로 쑥 들어가 버린다.
작년 설에는 꽃이 핀 난분을 상 위에 올려놓았다. 친구들과 후배들이 난과 상이 참 잘 어울린다고 찬사를 보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상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놀라기보다는 재미있다고 야단이다.
탱자나무 울타리 안의 세월도 마냥 봄날이었듯 여겨지는 것은 오래된 틀니처럼 하루가 다르게 들쑥날쑥한 기억력 때문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머리에 인 한 광주리 파꽃도 애차 서럽지가 않다.
마당의 매화가 피고 지기를 몇 번이었던가. 그렇게 불촉 같은 성질도 콩물처럼 변하고 요즈음 들어 부쩍 겨릅대 하나도 버거워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순간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어 마음이 급해진다.
올 설에는 저 상 위에 떡국 두 그릇을 놓고 아직도 명치끝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몽돌 하나마저 게워내야겠다.
눈발이 휘휘 날리는데도 어디서 강밥을 만드는지 펑 소리와 함께 고소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덩달아 아낙들의 치맛자락도 휘파람을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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