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개봉했던 '오베라는 남자'는 난생처음 본 스웨덴 영화였다.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멋진 풍광으로 눈 호강이나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프레드릭 배크만이 쓴 원작 소설이 꽤 유명한 베스트셀러라는 점도 선택에 한몫했다. 혹시 스포일러(spoiler)가 걱정된다면 이 글을 읽지 않기를 권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북유럽의 비경을 보겠다는 소박한 욕심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도 채워지지 않았다. 어느 조용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다루기 때문이다. 스웨덴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고유명사인 '아바'(ABBA)의 노래도 들리지 않는다.
스웨덴에 대해 막연히 갖고 있던 '선진국 환상' 역시 영화 도입부부터 무참히 깨진다. 평생을 바친 직장에서 오베가 어느 날 갑자기 정리해고를 당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정원 관리용 삽 한 자루를 퇴사 기념품으로 챙겨주는 건 우리나라보다 나은지도 모르겠다.
오베가 사는 동네도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이들로 넘쳐난다. 담배꽁초는 아무 데나 버려져 있고, 통행금지라는 팻말이 무색하게 승용차들은 마을 도로를 질주한다. 산책 나온 반려견의 무개념 배변, 한밤중에도 초인종을 눌러대는 몰염치는 늘 오베를 화나게 한다.
융통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원칙주의자인 오베는 당연히 그런 이웃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 요즘 유행어로 옮기면 '프로불편러'이니 말이다. 다만 지구 반대편의 '프로불편러'는 "이거 나만 불편한가요?"라고 운을 떼는 데 비해 오베는 '바보 멍충이'(idiot)라고 직설적으로 쏘아붙인다. 물론 그는 한바탕 욕을 퍼부은 뒤에는 상대의 잘못을 바로잡아주거나 부탁을 들어주는 마음 착한 아저씨이다.
영화를 보다가 대한민국에서 오베처럼 행동했다가는 비명횡사할지도 모른다는 잡생각이 들었다. '꼰대'라고 손가락질당하는 데 그치면 차라리 다행인 탓이다. 괜히 생면부지인 남의 일에 오지랖 넓게 나섰다가 폭행당했다는 뉴스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스웨덴이나 대한민국이나 남이 보지 않을 때 슬쩍 기초질서를 어기는 것은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겠지만 말이다.
사실 '프로불편러'는 우리 사회에서 밝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는다. 익명성 뒤에 숨어 인터넷이나 SNS에서만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다는 비아냥이 섞여 있다. 그러나 내 일이 아닌 일에는 모두 모른 체하는 '프로둔감러'만 넘쳐나서도 곤란하다. '모난 돌'이 있어야 세상은 바뀐다.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Brexit)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다 괴한의 총격으로 숨진 영국 하원의원 헬렌 조앤 콕스를 보라.
이왕 떠벌린 김에 영화의 결말마저 말한다면 오베는 '불운했지만 행복한 프로자살러'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 풍진세상(風塵世上)을 등지려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천수를 다하고 눈을 감는다. 유언장에서 '나를 좋아했던 사람만 불러달라'던 그의 장례식은 오히려 인파로 넘친다. 누군가의 말처럼,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댓글 많은 뉴스
[기고] 박정희대통령 동상건립 논란 유감…우상화냐 정상화냐
정청래, 다친 손 공개하며 "무정부 상태…내 몸 내가 지켜야"
양수 터진 임신부, 병원 75곳서 거부…"의사가 없어요"
‘1번 큰 형(러시아)과 2번 작은 형(중국)’이 바뀐 北, 中 ‘부글부글’
이재명, 진우스님에 "의료대란 중재 역할…종교계가 나서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