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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문의 한시 산책] '다다다 두두두' 한바탕 소낙비에 연잎들 신명 나네

청도 유등연지. 매일신문 DB
청도 유등연지. 매일신문 DB

소낙비(驟雨)

노긍

바람 사립 저절로 쾅, 깜짝 놀란 제비 새끼

소낙비 비껴 내려 골 어귀가 평평하네

푸른 연잎 삼만 자루에 들입다 쏟아지니

다다다다 두두두두 철갑(鐵甲) 군대 소리로다

風扉自閉燕雛驚(풍비자폐연추경)

急雨斜來谷口平(급우사래곡구평)

散入靑荷三萬柄(산입청하삼만병)

嗷嘈盡作鐵軍聲(오조진작철군성)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는 대로 왔다리 갔다리 하던 사립이 느닷없이 저절로 쾅 닫힌다. 일진광풍(一陣狂風)이 난데없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한바탕 소낙비가 쏟아질 조짐이다. 그 바람에 처마 밑의 제비 새끼들이 깜짝 놀라 새파랗게 질린 채 뒤로 넘어간다. 아니나 다를까, 삼대 같은 소낙비, 장대 같은 소낙비, 죽비 같은 소낙비가 대지를 마구 난타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소낙비의 물 화살, 소낙비의 물 폭탄이 연밭 위에다 집중적으로 융단폭격을 쏟아붓는다. 연밭을 아예 초토화할 작정인 모양이다.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연잎들도 일제히 3만 자루 연잎 방패를 번쩍 쳐들고 정면으로 맞받아치며 소낙비와 한바탕 맞짱을 뜬다. 다다다다다다다 두두두두두두두 퍼버버버버버버 파바바바바바바 1천만 화살과 3만 방패 간에 육탄전, 백병전이 한꺼번에 벌어진다. 살이 튀고 피가 튀는 무서운 전투다. 천둥 대포가 우르르르 쾅쾅 울고, 벼락불이 허공에서 소이탄을 번쩍번쩍 터뜨린다. 연밭 일대는 수만 기마병의 말발굽소리가 왁자지껄하며, 시끌벅적하고, 화살과 방패가 맞부딪쳐 요란하게 쇳소리를 내는 무서운 전쟁터로 돌변한다. 우와! 그것참 야단법석의 통쾌하기 짝이 없는 전쟁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잠시 후에 보면 연잎 방패는 그 무수한 난타를 당하고도 더욱더 시퍼렇게 푸르기만 한데, 소낙비는 어디 갔나 흔적도 없다. 피차간에 피해랄 게 아무것도 없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시치미를 딱 떼고 푸른 하늘에, 쌍무지개 한 채가 솟구쳐 올라 있을 수도 있겠다. 연잎 방패 뒤에 숨죽이며 피난하던 청개구리가 어느덧 연잎 위로 톡 튀어 올라와, 그 황홀한 각시 무지개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을지도 몰라.

푹푹 찌는 여름, 조선후기의 불우했던 시인 노긍(盧兢: 1738~1790)이 연출하는 이토록 신명나는 전쟁놀이가 하루에 한 번씩 와장창 벌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시원한 전쟁 대신에 날아오는 미사일을 사드로 막는 진짜 전쟁이 터질 것 같아 아슬아슬하고도 조마조마하다. "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가람 이병기 선생의 시조 '냉이꽃'의 한 대목을 전쟁광들에게 읊어주고 싶은, 정말 답답한 여름이다.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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