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고향 초등학교에서

뜨거운 햇볕을 받은 승용차 안이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휴일의 이른 아침이었지만 끈적끈적한 바깥 공기는 불쾌감만 더했다. 인적이 뚝 끊긴 도시를 탈출하는 그의 발바닥은 액셀러레이터 위에 있었다. 목적지는 50여 년 전, 처음 입학했던 시골 초등학교! 어린 시절의 희로애락을 몽땅 품은 곳이다. 또한 세월이 갈수록 그리움과 다정함, 안타까운 정감의 세계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2㎞쯤 떨어진 촌락에서 살았던 어린 꼬마의 등굣길은 고행이었다. 여름철 장마로 불어난 황톳빛 개울물은 공포감을 불러일으켰고, 한겨울 사정없이 몰아치는 삭풍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리게 했다.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끝내지 못한 전날의 숙제도 걱정거리였다. 여선생님의 손바닥 회초리와 호된 꾸중이 몹시 무서웠으리라.

동병상련의 코흘리개들은 학교 언저리 산 중턱에 쪼그리고 앉아 궁리 끝에 집단 등교 거부에 동의한 후 하교시간 때까지 온갖 놀이에 열중했다. 딱지치기, 팽이 돌리기,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 종이 태우기…. 시간가는 줄 몰랐던 그들은 서편 해를 등지고 초가집으로 돌아갔다. 까까머리들은 다음 날 선생님과 부모들로부터 호된 벌칙을 받았지만 가끔 특별 사면도 있었다.

즐겁고 신나는 날도 많았다. 봄 소풍과 가을 운동회 날이다. 비좁은 교실의 딱딱한 나무의자에서 벗어나 운동장에서 뛰노는 시간은 즐거웠고,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산사까지 걸어가는 학동들의 발걸음은 신났다. 어디 그것뿐인가! 평소 맛볼 수 없었던 김밥과 삶은 계란, 동방사이다, 박하사탕, 설탕 발린 전병은 보리밥과 된장에 절은 혀끝을 행복하게 했다.

허연 보름달이 시골 산천을 비추던 여름밤에는 할머니가 쪄준 옥수수를 입에 물고,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삼국지와 아라비안나이트 이야기를 들으며 호기심 가득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초승달이 뜬 컴컴한 밤에는 몇몇 동무들과 어울려 이웃집 포도밭과 자두밭에 들어가 낮에 보아두었던 과일들을 따 먹었다. 귀여운 선악과였지만 상큼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반세기 전 흑백필름들이다. 그때 눈앞에 펼쳐졌던 산천 풍경들은 많이 변했고, 같이 놀던 개구쟁이들도 만날 수 없지만 언제나 아름다운 고향 풍경화로 남아 있다. 요즘 추석이나 설 명절 때 마주치는 고향 사람들과 산천, 골목 풍경들과는 사뭇 다르다. 세월과 함께 고목이 되어버린 교정 어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앉아 있는 시간들은 잃어버린 귀향의 여로이기도 하다. 실향민들의 땅 도시에서 중년을 넘긴 그에게 정감의 땅은 고향 초등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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